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

by 보리남순

오늘도 날씨가 좋다. 우비를 준비하지 못하고 접이식 작은 우산만 챙겨 왔다. 젖은 옷은 세탁하면 그만이지만 신발이 문제다. 가뜩이나 발 상태도 좋지 않은데 비에 젖은 신발로 걷는다는 것은 생각만으로 끔찍하다. 스페인의 4월 날씨는 우리나라 가을날처럼 맑고 기온도 적당하고 걷기좋다. 대행이다.


알베르게에서 운영하는 식당에서 아침으로 먹을 빵과 커피를 주문하고 어제 하지 못했던 가게를 구경했다. 벽면에 부착된 선반에 진열되어 있는 물건들은 이곳이 일이 년 전에 생긴 가게가 아니라 꽤 오래되었으며, 전통과 지역문화에 자부심이 드러내 보여주었다

지난밤 사람들로 북적이던 그곳이 이곳이 맞나 싶게 손님 없는 아침은 조용하고 한가로워 보였다. 주인 남자가 구워준 토스트와 커피로 아침을 먹고 있을 때 한 여자가 들어왔다. 여자는 익숙한 듯 카운터 뒤 바로 들어갔고 안쪽에서 다른 일을 보고 있던 주인남자가 여자에게 다가가서 가벼운 포웅과 함께 쪽쪽 소리를 내며 양볼 뽀뽀를 한다.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반기듯 환하게 웃으며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에스파냐어를 모르는 나로서는 당연히 대화의 내용도, 두 사람의 관계를 알 수 있는 단서가 될 어떤 것도 찾아내지 못했지만, 살아온 날보다 살 날이 적어 보이는 남자와 남자보다 살날이 훨씬 많아 보이는 여성의 흔연스럽고도 다정해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는 내내 내 입가에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서양인들은 동양인들과 비할 때 가족보다는 개인의 삶을 더 중요시하며 노인 공경 같은 의식도 얕다고 우리는 상식으로 알고 있지만 여행에서 만난 서양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과는 다른 면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쩌면 우리보다 앞서 가족해체를 경험하고 난 뒤 돌고 돌아 다시 가족의 소중함을 되찾게 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두 사람은 부녀로 사이 추측되었다. 연로한 아버지와 중년의 딸이 나누는 스킨십과 다정한 이야기는 내 기억에는 없는 훈훈한 모습이다. 내가 가져보지 못한 것을 그들은 가지고 또 누리는 것 같아서 낯설지만 부러운 모습이다.

순례 4일 차 도착 할 곳은 아스토르가(Astorga)로, 고대다리가 있는 마을에서는 17km밖에 있다. 라틴어로 '별(estella)'과 '고향, 땅(terra)'의 어원을 가진 아스토르가는 '별이 비추는 땅'쯤 되겠다. 예약한 숙소는 공용알베르게이다. 공용알베르게는 사립 알베르게 비해 건물이 낡고 수용되는 사람이 많아 어떤 사람들에게는 피하고 싶은 곳일 수도 있겠으나 출발 전부터 나는 가급적 공용알베르게에서 묵기로 마음먹었다. 사립알베르게의 편리함과 안락함이야 언제든 선택가능한 곳이지만 오랜 시간을 품은 곳, 역사성까지 있는 장소에서의 하룻밤은 나 같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쉽게 허락되는 기회는 아니다.

스페인에는 파라도르라고 부르는 숙박시설 이 있다. 고성이나 오래된 수도원 같은 건물을 리모델링해 만든 고급 호텔로, 파라도르에서 하루 묵는 숙박비는 일반 호텔보다도 더 비쌌고 6유로에서 10유로를 사용료로 지불하는 공용 알베르게와 비교했을 때는 몇 십배가 넘는 비용 차이가 났다. 숙박비에 인색한 나 같은 사람에게는 오래된 것들에서만 찾을 수 있는 특별함이 있는 공용알베르게보다 더 합리적인 파라도르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예약해 둔 아스토르가의 파라도르에서 지역을 대표하는 유적들과는 걸어서 채 3분도 되지 않는다. 오며 가며 구경하기에도 적당한 것 같아서 이래저래 만족도가 높은 곳이다.


오르비고를 벗어나 아스토르가로 향하는 순례길은 레온에서 출발해 지난 3일 동안 걸었던 길과는 많은 것들이 달랐다. 도시를 벗어나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길을 걷는 순례자가 눈에 띄게 늘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지난 3일 동안 어디를 걸었을까 의구심이 들만큼 내가 걸었던 레온의 메세타 지역은 고즈넉했다. 눈 마주치며 인사를 나누고 또 몇 마디 말이라도 섞어볼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걷는 이 길이 좋다. 비로소 내가 순례길을 걷고 있구나 실감된다.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이 걷는다. 혼자 걷는 남자, 혼자 걷는 할머니, 혼자 걷는 10대, 다리를 절며 걷는 여자, 큰 배낭을 지고도 기린처럼 긴 다리로 겅중겅중 앞서 가는 젊은 남자, 아담한 사이즈의 똑같은 배낭을 나누어 메고 걷는 노부부도 있다. 처음으로 순례길에서 우리나라 단체 아줌마들도 만났다. 동창생으로 보이는 그들은 이름을 부르며 얘, 쟤 하며 친근하고 유쾌하게 수다를 떨어대는 모습들이 보기 좋았다. 그녀들은 경보경기에 참여한 선수들처럼 순식간에 바람처럼 빠르게 사라져 버렸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유독 눈에 들어온 사람은 다리를 절며 걷는 사람이다. 친구와 걷고 있는 독일 여성은 거의 다리를 질질 끌고 걷고 있다. 저 다리로 산티아고에 도달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면서도 어느새 맘속으로 기도를 하고 있다. "제발, 이 여정을 무탈하게 마치게 해 주세요." 당장 눈앞에 있는 남의 고통보다도 내 미래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불행을 대비하고 있으니.... 나이가 들어도 제 잇속 차리기에 급급한 것을 보면 앞으로도 나잇값 하며 살기는 그른 것 같다.


스페인은 돌이 참 많다. 돌길은 그렇다 쳐도 저런 험한 돌밭을 어떻게 갈아먹고사나 싶은 안타까운 마음이 절로 들었다. 마을 곳곳에 성당이 있다. 뜻하지 않게 성당순례를 나온 기분이다. 물 마시는 동상이 있는 음수대에서 만난 오스트리아 아저씨가 찍어준 사진. 직장을 은퇴하고 일주일 만에 도망치듯 순례길을 걷고 있다는 그. "이제부터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나" 숙제하는 중이라고 했다.


이 거대한 지구(행성)의 주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던 멋진 청년 파올로. 그를 만나고 나서 더 큰 꿈을 꿔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르비고에서 아스토르가의 중간쯤 되었을까, 산길이 이어지던 어느 지점에서 노포처럼 꾸며놓고 빵, 커피, 티, 과자, 과일 같은 먹거리를 쌓아 놓은 곳에서 사람들이 둘러앉아 음식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커피라도 한잔 마실까 싶어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손님을 맞는 주인도 계산대도 보이지 않았다. 배가 고팠던 터라 우선 먹고 보자 싶어 커피와 오렌지 한 개, 삶은 계란 한 개, 쿠키 한 개를 집어 들고 빈 의자에 앉아 먹었다. 나중에 주인이 계산하자고 들 때 계산이 편하도록 한 개씩만 골랐다. 마음 한편으로는 이런 산중에서 장사를 하자면 도시보다 물건값을 비싸게 받겠지 싶기도 했고, 바가지를 쓰게 되더라도 많이 쓰지는 않겠다는 얕은 계산속도 있었다.


가져온 것들을 다 먹도록 계산하자고 드는 사람이 없어 옆 사람에게 여기 주인은 어디 있니 물었더니 도네이션 카페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대답을 듣고서야 사람들의 행동이 보였다. 나처럼 주인을 찾는 듯 두리번거리는 사람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곳이 도네이션 카페라는 것을 아는 듯 자연스럽게 음식을 먹고 과일틈에 놓인 통에 돈을 넣고 갔다. 물론 그냥 가는 사람도 있었다. 놀라웠다. 도대체 이렇게 열려 있는 마음으로 살고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몹시 궁금했고 그를 찾고 싶다는 열망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한 젊은 남자가 내 레이다에 포착되었다. 그를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산중에서 무료 나눔이다 싶은 이런 곳을 돌보는(?) 사람이라면 우리나라에서 자발적 왕따로 살고 있는 텔레비전전속 자연인과 나이나 용모가 비슷할 거라고 나는 은연중 단정했던가보다. 줄어든 과일과, 과자 빵을 채우고 빈 컵을 가져다 설거지를 하고 있는 남자를 따라가서 그에게 물었다. "네가 여기 주인이니?" 그렇다고 대답했다. 나이로 보나 형색으로 보나 그는 우리나라 자연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멀쩡하게 잘 생겼고 한창 연애도 하고 스펙 쌓는 일로 바쁜 20대로 보였다. 프랑스 출신이며, 이곳에서 살게 된 것은 일 년 일 개월째라고 그는 순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럼 밤에도 여기서 자니 물었더니 한쪽벽에 지붕만 걸쳐진 곳을 가리키며 저기 인쪽 맨 끝에 있는 침대가 내 방이야 라고 대답하지 않나. 놀라서 벽은 없어?라고 다시 물었더니 없어!라고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하하하하 하고 웃고 말았다. 그도 따라 웃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I'm the owner of this planet."


스스로를 이 행성의 주인이라고 말하는 그의 말을 듣고 나는 크게 한방 맞은 것 같았다.

한 번도 궁금해 한적 없고, 한 번도 자신을 이 푸른 지구별의 주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만난 적 없고, 한 번도 내가 이 행성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꿈에서도.

자신을 행성의 주인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파올로가 더없이 커 보였다. 제 잇속 차리기에 급급했던 모습이 몹시 부끄러웠다. '신은 자신의 손길이 다 미치지 못하는 곳에 당신의 대리자로 어머니를 보냈다'라고 했던가.

제대로 된 나잇값을 하려면 나는 몇 명의 어머니가 더 계셔야 할까, 또 신은 얼마나 바쁘실까.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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