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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다리가 있는 마을에서

by 보리남순

세 번째 밤을 묵게 될 장소는 고대 다리가 있는 마을 '호스피탈 데 오르빅'이다. 이곳은 아주 오래전부터 산티아고를 향하는 수많은 순례자들의 거점 마을이었다. 순례자들의 편의 시설이 갖추어진 거점 마을이 되기까지 성 요한 기사단이 그 중심에 있었고, 마을이 커졌다.

기사단의 활약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은 오늘날의 로드맵으로 정착되었다. 긴 시간이 걸렸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중세시대의 순례자들은 멀고 먼 중동지역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났다. 예루살렘의 성지가 무슬림에게 정복되자, 유럽의 순례자들은 국내로 시선을 돌리게 된다, 로마교회의 승인을 얻게 된 후, 산티아고는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순례지가 되었다.

오늘날 프랑스 길로 알려진 생장 피드포르에서 출발해 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는 2천 리 길. 순례길의 상징이 된 노란색 화살표, 조가비는 물론 길을 안내하는 표지석 하나 없던 그때, 순례자들은 길을 잃기 일쑤였고 잠자리를 걱정했다. 무엇보다 장기간의 순례로 얻게 된 다리 부상과 상처를 제때 치료하지 못해서 생긴 감염병과 깨끗하지 못한 환경에서 얻게 된 피부병, 전염병은 순례자들에게 치명적이었다. 곳곳에서 순례자들의 얄팍한 지갑을 노리는 도적떼까지 출몰하였으니, 순례길은 목숨을 건 커다란 도전이었을 것이다.


이때 성 요한 기사단이 등장한다. 스페인 까미노에 '순례자 구호소(Hospital)'를 짓고 그들은 순례자들을 돌보았다. 기사단이 운영하던 ‘순례자 구호소(Hospital)’는 오늘날 ‘병원’보다 더 확장된 형태였다, 치료뿐 아니라 잠자리와 식사를 제공하고 휴식처가 되었다.


호스피탈 데 오르빅(Hospital de Órbig) 마을은 성 요한 기사단이 운영하던 순례자 구호소가 있던 곳으로, 마을이름도 순례자 구호소와 마을 앞을 흐르는 오르빅 강에서 유래한다. 이때 만들어진 호스피탈이 스페인 순례길의 알베르게 시스템으로 이어지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의 중심부에 남에 있는 성 요한 기사단 교회. 몰타 기사단으로도 부르는 기사단의 상징인 몰타 십자가를 교회탑에서 볼 수 있다.


고대 다리에 전해지는 전설

'호스피탈 데 오르빅 앞에는 오르빅 (Órbig) 강이 흐르고 있다. 강은 다리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다리 넘어 보이는 마을은 빨간색 건물이 인상적이었다. '고대 다리'는 몇 달 전에 완성했다고 해도 믿을 만큼 넓고 길고 깨끗했다. 오늘 아침 내가 출발했던, 15km 밖에 있는 시골 마을인 비야르 데 마싸리페 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풍스럽고 아름다웠다.

고대 다리의 이름은 '명예로운 걸음의 다리(Puente del Passo Honroso)이다. 13세기에 건축된 것으로 알려진 다리는 19개의 아치가 떠받치고 있는, 유럽에서는 그 빼어남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다리의 중간쯤에 기사 돈수에로의 전설이 기록된 안내판이 있다. 다리 위에서 펼쳐진 돈수에로 기사의 황당함은 세르반데스의 돈키호테를 능가했다.


한국어 설명이 없는 다리 위의 전설을 '대한민국 산티아고 순례자 협회'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으로 요약해 본다.


때는 후안 2세 시절, 기사 돈 수에로 데 까뇨네스는 그의 연인에게 '기묘한 약속'을 한다.

"당신에 대한 사랑의 표시로 나는 매주 목요일 목 칼을 차고 다닐 것이오. 만일 내가 이 언약을 깨트린다면 나는 3백 개의 창을 부러뜨리거나 오르비고 강 위의 다리에서 한 달 동안 결투를 할 것이오."

'이게 뭔 소리야~.' (광고 내용은 생각나지 않지만, 이 목소리는 너무나 귀에 생생하다.)

그러나 곧 기사는 자신의 언약을 후회하며 동료 선 후배 기사들에게 호소한다.

"제발 나와 싸움을 해 주세요, 이 빌어먹을 목칼을 벗을 수 있게 도와달란 말입니다."


그래서, '(또라이) 수에로 기사는 어떻게 되었냐고?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하리라'는 말처럼, 기사 돈 수에로 데 까뇨네스는 보통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누리던, 집안에서 늙어 죽지는 못했다(고 전해진다.)


누구나 누릴 것 같은 '늙어 죽는 일'이 축복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나치 전범을 추적하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였다. 어디서 읽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병들어 오늘내일하는 사람들이라도 '절대로 그들의 집에서 편안히 죽음을 맞이하는 기회를 줄 수 없다'라고 했던 그들의 말에서 평범하게 사는 삶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 하찮은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특별할 것 없는 내 삶을 특별하게 보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돈 수에로 기사의 전설이 남아 있는 '명예로운 걸음의 다리'. 폭이 넓다. 보행로뿐 아니라 마차의 통행도 고려되어 설계된 것 같았다.


예약했던 알베르게는 다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레스토랑과 겸하고 있었다. 숙소에 도착을 하고도 선뜻 들어가지 못한 채 나는 몇 번이나 주소를 확인했다.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 밥을 먹는 것처럼 안과 밖에 있는 테이블은 만석이었고, 시끌시끌했다. 차림새나 태도로 보았을 때 관광객은 아니었다. 동네에서 결혼식 치른 뒤, 식당에서 피로연을 여는 것 같았다. 마을로 들어오던 중에 강변에서 웨딩드레스를 입고 사진을 찍는 모습을 얼핏 보았다.


알베르게는 식당 깊숙한 곳에 있었다. 카운터에 있던 젊은 여성이 나를 중년 여성에게 인계한 뒤 총총 사라졌다. 중년여성은 몸을 꼬듯 흔들며 말없이 나를 바라보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간단한 영어 조차 하지 못한 듯 보였다. 웃고 있는 그녀에게 여권을 건네주었다. 순례자 여권(끄레덴시알 Credencial)은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여성은 여권을 나에게 돌려주고 난 뒤 고대다리 양각되어 있는 도장(스탬프)을 내 순례자 여권에 찍은 뒤, 27-4-2025라고 숫자를 썼다. 말 한마디 없이 체크인을 했고, 방을 안내받았다. 모든 일은 침묵 속에서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오르빅에서 유명한 음식은 송어 요리이다. 우리나라에서 송어는 산천어로 더 친숙하다. 내가 먹은 것이 송어 수프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따끈한 슾 한 그릇을 맛있게 먹었다.


이른 저녁을 먹고 마을 산책에 나섰다. 알베르게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흥겨운 음악 소리가 들렸다. 강변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쭉쭉 뻗은 나무 사이로 테이블이 놓여 있고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까 식당에서 밥 먹던 사람들일까?'

'축제일까, 결혼식 후 피로연일까?'


빨간 줄을 쳐서 외부인이 들어가지 못하게 한 걸로 보아 동네 사람들만의 축제 같았다. 전통복으로 보이는 의상 -남녀 모두 흰색 상의에 까만색 조끼를 입었고, 남자는 까만색 칠부바지를, 여자들은 빨강과 노란색에 까만 자수가 들어간 치마-을 입은 남녀가 파트너를 바꾸어 가며 춤을 추며 원을 그렸다. 사람들은 무척 흥겨워 보였다.

어우러져 춤을 추는 사람들은 행복해 보였다. 단순 관광지가 아니라 전통과 함께 하는 마을 공동체가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오르빅 마을에서 보낸 하룻밤은 무척 특별했다. 고등학생이 되어 처음으로 세계사 교과서를 받았던 때가 생각났다. 영화나 소설에서 보던 나라를 교과서로 배우게 되었을 때 얼마나 가슴이 뛰던지.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나라가 궁금했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먹는 음식을 먹어 보고, 또 그들이 사는 집에 들어가 보고 싶었다. 70년대의 내 세계는 너무나 제한적이었고, 하루하루는 밋밋했다. 영상으로 세계 어디든 가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여전히 눈으로 보는 세계에서는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영상에는 맛, 냄새, 감각할 수 있는 것들이 없기 때문이다.


책으로 읽은 것들은 쉽게 휘발되었다. 세계사를 좋아했지만 시험점수는 좋지 않았다. 반대로, 직접 경험했던 것들은 시간이 오래 지나도 잊히지 않는다. 네팔의 가넨드라 국왕 이름과 방콕 도시를 가르며 흐르던 차오 프라야강 이름 등, 발로 만난 그곳은 일부러 기억하지 않았어도 인장처럼 선명하다. 그곳의 작은 뉴스에도 귀를 쫑긋 세우게 된다. 어릴 때 세계사 책으로 배우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런 것들이었던 것 같다. 그들이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아는 것. 그래서 그들과 친밀해지는 것. 적대하지 하지 않는 것. 차별하지 않는 것. 차별당하지 않는 것.


순례자들의 거점이며 쉼터이기도 한 이곳에서 과거의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다. 왜 여행을 하는지? 여행으로 얻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나는 지금 무엇을 두려워 하는지. 쉽게 휘발되지 않은 것들은 왜 소중한지.


아, 그리고 중요한 것 하나 더. 잘 살다 늙어 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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