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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오고 싶어

하늘 끝에 걸쳐진 황무지에서

by 보리남순

경숙 씨와 헤어져서 나는 아침에 예약한 알베르게 JESUS로 향했다. 지도에 눈을 두고 바삐 걸음을 재촉했다. 내 배낭이 무사히 도착해 있을까, 처음 경험하는 일에서는 언제나 봄날 아지랑이 같은 불안감이 피어났다. 안전을 확인받는 순간 불안은 사라지고, 이후에는 한동안 평온한 상태가 유지되었다. 당장은 배낭의 안전을 확인해야 했다.


아침에 출발했던 도시 레온에서 비야르 데 마싸리페(Villar de Mazarife) 마을은 불과 2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걸어서는 대여섯 시간이 걸렸지만 자동차로 이동하면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을 거리이다. 그런데 눈앞에 보이는 풍경은 사뭇 달랐다. 마을 중앙에 서 있는 레온의 상징인 사자상마저 낡고 초라해 보였다. 이곳에 사람이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지구촌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개, 고양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지도에 코를 박고 서둘러 알베르게로 향할밖에.


바닥에 써 놓은 노란색 글씨 때문에 찾게 된 Albergue JESUS

바닥에 쓰여 있는 노란 글씨가 없었더라면 그냥 지나칠 뻔하였다. 귀여운 노란 화살표 두 개가 알베르게를 가리키고 있었다.

열린 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내 배낭이 보였다. 그런데 달랑 내 배낭만 놓여있다. 다른 순례객들은 없는 걸까...? 아니면 벌써 도착해 배낭을 찾아간 걸까...? 배낭을 왼쪽 어깨에 둘러메고 안으로 더 들어갔지만 소음하나 들리지 않았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벽화를 발견했다.


오늘 아침, 동키서비스로 배낭을 보내기 위해 급하게 숙소앱에서 찾은 알베르게가 바로 여기였다. 소박한 시골의 정서를 가진 호스트가 순례자들과 교감하는 알베르게이며, 순례자들이 마음으로 남긴 벽화가 있다는 설명을 읽고 이 숙소를 선택했었다.

2층으로 오르는 계단 벽면 가득 그림과 글씨가 채워져 있다. 나와는 상관없는 교감의 흔적을 보는 것만으로도 따뜻한 안도감으로 불안감과 조급증이 시나브로 사그라졌다.


어이, 호세!!


2층까지 오르며 그림을 다 보고 내려오도록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아래층에 있는 작은 문을 열고 빼꼼 안을 들여다보았다. 쏟아지는 여섯 개의 눈.

"어이, 호세!!" 그들 중 한 명이 안쪽을 향해 소리쳤다.

잠시 후 나에게 안으로 들어오라 손짓을 하더니 다시 손가락으로 안쪽을 가리켰다. 쭈뼛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 한 노인이 앉아 있다. 호세가 분명했다. 불을 켜지 않은 어두컴컴한 곳에 앉아 있던 호세가 일어섰다. 의자와 테이블이 여러 개 놓여 있었고, 뒷마당으로 나가는 문이 하나 있었다. 문 너머에는 파란 잔디가 깔린 넓은 마당이 있었고, 호세의 공간과 달리 밝은 햇살이 가득했다. 빨랫줄에 걸린 바지와 티셔츠, 양말이 살랑살랑 춤을 추고 있다. 오늘 이곳에 묵는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닌 것 같았다.


작은 키에 짧은 머리를 한 호세는 표정 없는 얼굴로 "페스포트'라고 웅얼거렸다. 나는 어깨에 멘 배낭을 의자에 올려놓고 작은 배낭에서 여권을 꺼내 호세에게 건네주었다. 호세는 노트에 무엇인가를 적고 난 뒤 여권을 돌려주고는 남자들이 있던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나도 얼른 배낭을 왼쪽 어깨에 둘러메고 그를 따라갔다.


호세가 안내한 2층에는 여러 개의 문이 있었고, 그중 가운데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2층 침대가 세 개 놓인 6인실이었다. 배낭은 보이지 않았다. 6인실에서 그날 나는 혼자 묵었다. 양말과 속옷을 빨아 뒷마당으로 나갔을 때 앉아 있던 중년의 부부 한쌍과 그들과 떨어진 곳에서 노닥거리는 십 대로 보이는 서너 명의 남자들을 보았다. 그뿐이었다.


알베르게 JESU에서 묵는 동안 말없는 교감을 나누었던 상대는 '어이, 호세'였다. 나도 한 번쯤 '어이, 호세!' 하고 불러보고 싶었지만 그럴 기회를 갖지 못했다.

와이파이 비번을 물으려고, 또 커피 한잔을 마시려고 일층 바에 들어갔을 때 그곳에는 늘 서너 명의 사람이 있었다. 우리 동네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차림새의 노인들이었다. 맥주잔을 앞에 둔 그들은 마치 다른 선택지가 없던 사람이 누구라도 말 섞을 사람이 필요해서 나온 것처럼 심드렁한 표정으로 진지하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 같았다.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표정과 목소리의 변화로 상상하는 재미에 한동안 그들의 이야기를 눈으로 들었다.


바는 내가 그곳에 있는 동안 한 번도 빈 적이 없었다. 내가 바에 들어갈 때마다 그들이 얼른 나를 대신해 "어이, 호세" 하고 그를 불러 주었기 때문에 나는 끝내 그를 불러볼 기회를 갖지 못했다. 내가 아쉬워하는 것은 그의 이름을 부르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짧게라도 그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갖지 못함이 못내 아쉬웠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또 그에 조응한다는 의미에는 교감을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 담겨 있으니까. 벽화를 남기고 떠난 순례자들처럼 나도 호세와 교감하고 싶었다.

알베르게 지저스의 붙박이 아저씨들


고대다리가 있는 마을까지 15Km


오늘 도착할 지점은 호스피탈 데 오르비고(hospital de orbig)로 비야르 데 마싸리페(villar de Mazarife)에서 15km 떨어져 있다. 숙소 앱에서 '고대 다리가 있는 마을'이라는 설명 때문에 선택했다.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배낭을 남겨 두고 알베르게를 나왔다. 시간은 아홉 시가 넘어 있었다. 조용한 시골 마을을 벗어나 한참을 도로를 따라 걸었다. 늦게 출발했기 때문인지 걸어가는 순례자 한 명 볼 수 없었다. 간혹 자전거를 탄 순례자가 흙먼지를 날리며 내 옆을 빠르게 지나갔다.


나도 자전거 타기를 좋아한다. 코로나 전에는 매주 토요일 오전이면 남편과 함께 두어 시간씩 자전거를 탔다. 동네를 벗어나 자전거를 타고난 뒤 먹던 점심은 꿀맛이었다. 아침을 거르고 운동하고 먹은 첫 끼니였으니 말해 뭣 할까. 시장이 반찬이더라고 편의점에서 산 삼각김밥과 컵라면 하나가 세상 부럽지 않은 산해진미였다. 쭉 일직선으로 뻗은 평탄한 순례길을 흙먼지 휘날리며 걷는 순례자를 쌩 지나쳐 자전거로 질주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자신은 없었다. 레온의 길은 평탄했고 한적했으나 바닥은 울퉁불퉁 돌길이었다. 그런 길에서 자전거를 탈 수 있는 사람은 딱 두 종류다. 강철 같은 엉덩이 근육을 가진 사람이거나, 마음이 너무 아파서 엉덩이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 두 가지에서 자유로운 나는 그냥 걷기로 했다. 느리게, 자유롭게!



세상은 온통 하늘의 파란색과 땅의 황토색 두 가지뿐이었다. 그 이외의 색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두 가지 색이 만들어낸 세계는 고요하다 못해 적막했다. 나는 광활한 황무지를 걷고 또 걸었다. 넓은 들판과 빈농경지 사이로 누런 흙길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훨훨 새처럼 춤추며 걷다가 흙먼지가 풀썩이는 길에 털썩 주저앉았다. 배가 고팠다. 가방에는 바르셀로나에서 샀던 빵과 치즈덩이가 남아 있었다. 맛없는 빵을 물과 먹고 있던 중 무겁게 배낭을 멘 중년의 여성이 나를 지나쳐 가다가 돌아서서 물었다. " Are you okay?"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I'm Okay" 입속에 구겨 넣은 빵으로 빵빵해진 볼을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내가 불쌍해 보였나...?' 빠르게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이 광막한 황무지가 가슴 벅차게 좋았다. 왜 좋은지 그 이유를 묻는다면 설명할 말을 찾을 수는 없다.

'온갖 꽃들이 만발하고 따뜻한 바람이 부는/나의 마음은 솜구름 구름/푸른 하늘을 나르는 새들 새들/그대는 저 넓은 들판을 수놓은/들판을 수놓은 어여쁜 꽃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풍경이 너무 좋았다.


1978년 발매된 산울림의 3집 앨범에 수록되어 있는 노래, '내 마음(내 마음은 황무지)'는 18분이 넘는 긴 곡이다. 둔탁하게 공명하는 북소리처럼 한껏 누르며 부르는 보컬은 카스티야 이 레온(Castilla y Leon)의 메마른 황무지를 노래한 것 같다.


나의 마음은 황무지 차가운 바람만 불고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그런 황무지였어요

그대가 일궈 놓은 이 마음

온갖 꽃들이 만발하고 따뜻한 바람이 부는

기름진 땅이 되었죠

나의 마음은 황무지 차가운 바람만 불고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그런 황무지였어요

그대가 일궈 놓은 이 마음

온갖 꽃들이 만발하고 따뜻한 바람이 부는

기름진 땅이 되었죠

나의 마음은 황무지 차가운 바람만 불고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그런 황무지였어요

그대가 일궈 놓은 이 마음

온갖 꽃들이 만발하고 따뜻한 바람이 부는

기름진 땅이 되었죠

나의 마음은 솜구름 구름

푸른 하늘을 나르는 새들 새들

그대는 저 넓은 들판을 수놓은

들판을 수놓은 어여쁜 꽃들

나의 마음은 황무지 차가운 바람만 불고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그런 황무지였어요

그대가 일궈 놓은 이 마음

온갖 꽃들이 만발하고 따뜻한 바람이 부는

기름진 땅이 되었죠


스페인 내륙에 위치한 카스티야 이 레온(Castilla y Leon)은 대표적인 고원지대이다. 척박하고 메마른 이 땅에서는 밀, 보리 같은 겨울 작물들이 자란다. 4월과 5월의 레온지역은 빈 땅이 끝없이 펼쳐진 황무지로 보인다. 두 가지 색을 입은 이곳의 황무지는, 이 지역의 전형적인 경관으로 황량한 아름다움이 있다.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이곳만의 풍경 안에서 나는 한껏 자유로웠다.


어느 날 전화 통화를 하던 중 남편이 내게 물었다.

"다시 가라고 하면 갈 수 있겠어?"

"응. 다시 오고 싶어." 남편의 물음에 대답하며 나는 이곳 광막한 황무지를 머리에 떠올렸다. 딱 이맘때 이곳에 다시 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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