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사람은 맑은 날처럼 전염성이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게 되는 첫날이다. 레온에서 산티아고 콤포스텔라까지는 310킬로미터, 보름 동안 순례길을 걸을 것이다. 신발 끈을 단단히 조여 묶고서 길을 나섰다.
날씨는 말할 수 없이 맑았고 청명했다. 서정주 시인의 <푸르른 날>에 송창식이 곡을 붙여 부른 노래가 있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저 저, 가을 꽃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이렇게 좋은 날에는 절로 이 노래를 흥얼거리게 된다. 레온의 봄날 하늘은 우리나라에서 보았던 가을하늘과 같이 파란 하늘에 흰구름이 두둥실 떠 있다.
초등학교 때 미술시간에 60명이 넘는 우리 반 아이들이 그린 하늘은 똑같았다. 누군가 하늘은 이렇게 그려야 해,라고 말해준 것처럼 8절지 도화지 위에 구름을 두세 개 그리고 나머지 여백을 '하늘색'이라고 쓰여 있는 크레파스로 모두 채웠다. 얼마나 힘주어 크레파스를 문질렀던지 아이들이 그린 파란 하늘에는 목욕탕에서 밀어낸 떼뭉치 같은 찌꺼기가 남았다. 꼼꼼하게 칠한 친구들의 도화지에 크레파스뭉치는 더 많이 남았다. 선생님께 도화지 뒷면에 '참 잘했어요' 도장을 받고 나면 그림은 나 몰라라 팽개치고는 구름같이 운동장으로 뛰어나갔다. 아이들의 머리 위에는 방금 그렸던 파란 하늘, 하얀 구름이 두둥실 떠 있었다.
오르막 길을 한참 걸어 도시의 끝자락에 이르렀을 때였다. 뒤 돌아 내가 걸어온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 배낭을 멘 한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녹색 커버로 배낭을 씌우고 스틱을 짚으며 걸어오는 사람은 여성이었다. 돌아서 가려다 기다려 보기로 했다. 마지막이 될 레온의 도시를 눈에 담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일행을 만나도 좋겠다는 바람도 담겨 있었다.
그렇게 경숙을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프랑스에서 순례를 시작했고, 24일째 걷는 중이라고 했다. 이직 준비를 하다가 잠시 쉬자 싶어 순례길을 걷게 되었다고 했다. 이제 막 순례를 시작한 나에게 찾을 수 없는 어떤 것들이 그녀에게는 있었다. 단단하게 배낭을 멘 모습과 일정한 보폭으로 내딛는 발걸음에서도 힘이 느껴졌다. 같은 언어로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신이 났다. 한국을 떠난 지 5일 만에 2번째 만난 한국인 경숙과 나는 정신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도 한국말이 고팠던 것 같았다.
"언제부터 순례자들은 이 길을 걷게 되었을까요?"
한참 이야기를 하며 걷고 있을 때 눈길을 끄는 조형물이 보였다. 지팡이를 짚은 순례자 형상과 연못이라 부르기도 조야한 웅덩이가 있었다. 얕은 진흙탕 물에는 물풀 하나, 물고기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탁한물속에 두 사람이 있었다.
이곳은 순례의 시작을 알리는 장소로, 본격적으로 순례를 하기 전에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라는 메시지가 있는 장소이다.
순례자 발 아래 푸엔테 엘 카닌 Fuente El Canin은 각각 '샘''작은 개'라는 낱말로 정화, 순종을 의미한다.
잠시 그곳에 머물며 우리는 각자의 생각에 잠겼다. '나는 이곳에 왜 왔을까?' 스스로에게 질문 했던 것 같기도 하다.
푸엔테 엘 카닌을 출발하며 경숙에게 물었다.
"그런데 언제부터 순례자들은 이 길을 걷게 되었을까요?"
무심히 떠오른 질문이었지만, 경숙이 들려준 이야기는 자못 진지하고도 흥미로웠다. 그녀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이랬다.
유럽에서 순례길이 시작된 것은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난 후부터이다. 그의 어머니 성 헬레나가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성지를 발굴하고 교회를 세우면서 예루살렘으로의 순례 전통이 유럽사회에 널리 퍼지게 된다.
그러나 7세기 이후 이슬람 세력이 확장되면서 전쟁, 질병, 강도 등의 위험으로 예루살렘 순례가 어려워 자, 유럽 내부의 성지가 주목받기에 이른다. 교회는 유럽 내 성지순례도 예루살렘 순례와 같은 공덕을 얻을 수 있다고 공표하며 유럽 내부에 있는 성지에 힘을 싣는다.
이후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이탈리아의 로마, 영국의 캔더베리 대성당이 성지로 자리 잡으며 이곳을 찾는 도보 순례길이 점차 정착되었다.
"잘하셨어요, 언니 무릎은 소중하니까."
이야기를 마친 경숙 씨가 내 등에 맨 작은 배낭을 보더니 물었다.
"언니는 동키 하셨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에게 물었다.
"네. 경숙 씨는 무릎 괜찮아요?"
"저는 아직 괜찮습니다. 호호호"
그녀는 짧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언니 배낭 배달하는 서비를 '동키서비스(Donkey Service)'라고 하잖아요? 옛날에는 지금처럼 순례길에 편의시설이 많지 않았을 거예요. 교통도 불편했고, 또 숙소나 식당도 드물었을 거예요. 순례객들 중에는 잘 걷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을 테고요. 그들 중 일부는 실제로 당나귀를 타고 순례를 했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나도 한국에서 연주 씨에게 당나귀를 탄 순례객 이야기를 들었다. 같은 동네에 사는 연주 씨는 나보다 앞서 산티아고 순례길 800km를 완주했다. 순례길을 준비하는 나에게 여러 가지 자신의 경험과 팁을 말해 주었고, 동키 서비스는 꼭 받아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 사람도 그녀였다. 50대의 연주 씨는 올 초 무릎 수술을 받았고 내가 출발할 때까지도 목발을 짚고 있었다.
경숙 씨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본래 당나귀는 짐을 싣고 다녔잖아요. 당나귀 대신 지금은 배낭을 차로 배달해지만, 그러니까 동키서비스에는 역사적 유래가 담겨 있는 거죠."
"그래, 맞네. 역시 작명은 중요해. 배낭 서비스라고 하는 것보다 동키 서비스가 훨씬 있어 보이잖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출발 전부터 동키서비스받는 문제를 두고 갈등했고, 그 결정은 레온에 도착할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배낭을 메고 3백 킬로를 완주할 자신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지레 포기하기도 싫었다. 순례길에서 동키서비스는 반칙이라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출발 전까지 연주 씨는 고집 피우지 말고 나이 생각을 해서 동키를 하라고 성화를 부렸고, 또 다른 지인인 동선생님은 동키비로 쓰라며 내 손에 봉투를 쥐어 주었다. 그럼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짐을 줄이고 줄여서 9.6Kg의 배낭을 메고 출발을 했다.
"언제 내 고집이 꺾였는지 알아요?" 동키서비스에 대한 저간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난 뒤 경숙 씨에게 내가 물었다.
"언제 결정하셨어요?"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경숙 씨가 물었다.
"오늘 아침에요. 알베르게 문 앞에 순례자들이 놓고 간 배낭이 줄줄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나니까, 쉽게 결정이 되더라고요. 뒷 줄에 슬그머니 배낭을 놓고 나와 버렸죠, 뭐 하하하하."
"잘하셨어요, 언니 무릎은 소중하니까요." 경숙 씨가 박수까지 치며 칭찬했다.
"여기 정말 좋지 않아요?"
레온의 순례길은 내가 바라던 딱 그런 길이었다. 순례길을 준비하면서 컴퓨터로 백장이 넘는 사진을 봤지만 사진에서는 내 눈앞에 펼쳐진 이 길과 이 하늘, 광활한 나대지 가득 피어 융단처럼 펼쳐진 꽃들에서 느끼는 기쁨과 감동은 찾지 못했다. 게다가 이렇게 멋진 말동무를 만나 함께 순례길을 걷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긴 삶의 여정에서 느꼈던 고단함과 피로가 이 풍경으로 사르르 녹아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첫 순례길에서 만난 경숙과는 Villar de Mazarife의 갈림길에서 헤어졌다. 경숙이 예약한 숙소는 더 걸어야 했다. 우리는 다음 순례길에서 다시 만나게 되기를 기약했다.
밝은 사람은 맑은 날처럼 전염성이 있다. 그녀와 함께 했던 3시간 남짓 동안 참 많이 웃었고,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