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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운 바위풀 Oct 10. 2021

이미지의 변용 - 왕궈펑 <필터>

베이징 798 예술촌 - 진커콩지엔

시각예술 플랫폼 아트렉처에 기고한 전시 리뷰입니다. 작품 이미지를 포함한 전문은 링크(https://artlecture.com/article/2513)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왕궈펑의 필터는 눈에 보이는 현실을 사라지게 했지만 덕분에 눈에 보이지 않던 현실을 환기하게 만들어 줍니다. 지워지고 늘어난 풍경 안에 생각할 거리가 들어섰죠. 그것은 지금 우리가 있는 현실과 그것을 둘러싸고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길게 늘어뜨린 색의 터널을 걸으며 우리를 돌아보는 기분이 드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전시 서문에서 이번 이미지들이 따뜻한 (warm) 느낌을 준다고 표현한 것도 아마 그런 느낌 때문일 것 같기도 하고요.



전시장 입구.


베이징에도 어느덧 가을이 온 듯합니다. 


몇 개월, 1년, 길어야 2년이면 사그라들리라 생각했던 코로나  바이러스는 세상을 새로운 B.C. (Before Covid)와 A.C. (After Covid)로 바꾸어 놓았죠. 마스크 없이는 살 수 없는,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도 없는 세상에 답답함을 느끼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중에서도 조금 더 예민하게 시대를 헤쳐나가고 있는 이들이 예술가들입니다. 디스토피아와 같은 세상 풍경이 그들의 감정선을 울리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서인지 작년과 올해 찾은 전시 중에 많은 수가 이 시대를 헤쳐 가는 예술가들의 마음을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9월 말부터 베이징 진커콩지엔에서 열리고 있는 왕궈펑의 전시 <필터>도 그중 하나고요. 


왕궈펑은 중국의 유명 사진가로 한국에서도 몇 번 전시를 한 적이 있습니다. 주로 그가 찍은 북한의 풍경으로 주목을 받았죠. 그는 북한 정권의 공식적인 허가를 받고 사진을 찍었는데, 아무래도 우리는 쉽게 볼 수 없는 풍경이다 보니 더 많은 관심을 받았을 겁니다.


잘 알려진 왕궈펑의 작업으로는 중국을 비롯하여 옛 동유럽 국가들과 쿠바 같은 사회주의 국가의 주요 건축물을 찍은 [Ideal] 시리즈와 [Utopia] 시리즈가 있습니다. 중국의 현대 예술을 소개한 책 1)에서 이 작품들을 처음 접했는데요. 그가 이미지를 만드는 방식이 독일 작가 마쿠스 브루네티의 파사드 2)와 비슷해서 기억에 남았습니다. 두 사진가 모두 거대한 건축물을 수백, 수천 장이 넘는 부분 이미지로 쪼개서 찍은 다음 합치는 방식으로 초현실 속의 풍경을 만들어 냈습니다. 


설치 전경.


그런데 왕궈펑이 찍은 중국 인민대회당과 브루네티가 찍은 밀라노 대성당에는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유럽의 종교 건축물들을 담은 브루네티의 이미지가 수 세기를 넘어 이어져 온 역사의 흔적을 담고 있다면, 지어진 지 수년에서 수십 년이 지난 왕궈펑의 사회주의 국가 건축물은 역사보다는 현 체제의 상징 3)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왕궈펑의 피사체들이 세워진 목적이기도 했고요. 그래서 똑같이 초현실 풍경을 통해 거대한 건축물을 재현했는데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진커콩지엔에서 열리고 있는 <필터> 전시는 왕궈펑이 사회주의 건축물 시리즈와 함께 계속 작업 중인 유토피아 시리즈의 연장에 서 있습니다. 간략한 소개를 읽고 포스터 속 이미지를 보았을 때는 별다른 감흥이 일지 않아 그저 평범한 디지털 작업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눈앞에서 직접 마주한 작품의 힘은 포스터로 보던 것과는 다르더군요. 전시장에는 긴 폭 2m, 짧은 폭 1.5m인 대형 인화물 10점이 걸려 있었는데요. 뭐랄까요. 단순한 이미지의 변용이 아니라 감정이 느껴진다고 말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모두 ‘무제’라고 이름 붙인 사진 속 풍경은 어딘가의 도시에 있는 건물입니다. 프레임 한쪽 귀퉁이에는 아주 조금 그 흔적이 남아있지요. 간판의 글씨도 조금 보입니다. 한데 사진 속 장소가 어디일지 궁금해하는 관객의 호기심은 거기서 끝이 납니다. 왕궈펑이 칼로 자른 듯한 풍경의 색을 반대쪽까지 늘려서 프레임을 마무리했기 때문이지요. 이 늘어진 색의 터널이 현실을 바라보는 작가의, 그리고 이미지를 바라보는 관람객의 “필터”가 됩니다. 4)


설치 전경.


왕궈펑의 필터는 눈에 보이는 현실을 사라지게 했지만 덕분에 눈에 보이지 않던 현실을 환기하게 만들어 줍니다. 지워지고 늘어난 풍경 안에 생각할 거리가 들어섰죠. 그것은 지금 우리가 있는 현실과 그것을 둘러싸고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길게 늘어뜨린 색의 터널을 걸으며 우리를 돌아보는 기분이 드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전시 서문에서 이번 이미지들이 따뜻한 (warm) 느낌을 준다고 표현한 것도 아마 그런 느낌 때문일 것 같기도 하고요.


사회주의 건축물 시리즈의 초현실 풍경, 유토피아와 무제 시리즈 같은 이미지의 변용, 그리고 홍콩 민주화 시위 이미지를 확대하여 만든 픽셀 시리즈처럼 왕궈펑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서 더 많은 의미를 발견하는 사진가입니다. 그리고 이번 전시 또한 이러한 작업 방향과 궤를 같이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이미지의 변용이 아니라 감정이 느껴진다고 한 것도 이런 맥락이고요.


진커콩지엔의 전시는 기대하지 않았던 좋은 작품을 만나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조금 지쳐 있던 최근의 저를 돌아볼 수도 있었고요. 아마 그래서 더 마음에 와닿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이런 게 또 전시를 찾아가는, 새로운 작품을 만나러 가는 이유겠지요. 


설치 전경 일부.




각주 :

1) 김도연, <북경 예술 견문록>, 생각을담는집, 2014, p.236-255

2) 최다운, <뉴욕, 사진, 갤러리>, 행복우물, 2021, p.30-45

3) 왕궈펑은 베이징의 건물들을 찍을 때 수상한 사람으로 신고가 들어가 여러 번 경찰을 만나야 했다는 이야기를 했는데요. 이는 그의 피사체가 그것이 지탱하고 있는 체제에 양날의 검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들려주는 듯하기도 합니다. - 김도연, <북경 예술 견문록>,  생각을담는집, 2014

4) 전시 서문, 진커콩지엔, 2021


기타 참고 자료 :

- “How to connect our memories”, 2019, https://photography-now.com/exhibition/139116

- Xu Ming, “The Torn Photograph”, Global Times, 2015. 05. 19

- Yuan Fuca, Wang Guofeng interview, Randian, 2016. 03. 15, http://www.randian-online.com/np_blog/randian-wang-guofeng-interview/


전시 일정 :

- 2021. 09. 25 ~ 11. 05 / 화 ~ 토 11:00 ~ 18:00

- 진커콩지엔 (今格微空间 : Ginkgo Space), #65, 798 예술촌, 차오양구, 베이징

https://mp.weixin.qq.com/s/YRnfU8iL5gWWp2vAeKlF3w


전시 포스터. Courtesy of the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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