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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운 바위풀 Dec 15. 2021

수백 개의 자아에 담긴 내러티브

<신디 셔먼 : On Stage> 전시 리뷰

시각예술 플랫폼 아트렉처에 기고한 전시 리뷰입니다. 작품 이미지를 포함한 전문은 링크(https://artlecture.com/article/2591)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신디 셔먼에 대한 A-Z를 정리한 한 기사는 그녀의 커리어를 하나의 거대한 병치(a huge juxtaposition)로 규정했다. 예술계를 지배하는 자본에 저항했지만 가장 많은 돈을 버는 중 작가 중 한 명이 되었으며, 전형적인 아름다움에 반기를 들었지만 고급 패션 브랜드와 협업했다. 자화상이 아닌 자화상을 찍었고 (self-portraits that should be viewed as anything but that), 적극적인 페미니스트가 아니었지만 그녀의 작품은 누구보다 많이 페미니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찌 보면 모순이라고 할 수 있는 셔먼의 삶은 어찌 보면 꾸준히 일관되었다. 자신은 언제나 다른 쪽(the other side)에 끌렸었다고 고백한 셔먼은 지난 사십여 년간 미묘한 이질감이 느껴지는 인물과 장면을 끊임없이 창조했다. 이렇게 만든 이미지들은 관객의 마음속에 기묘한(주로 불편한) 감정을 불러오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도록 촉진한다. 셔먼은 이러한 순간을 통해 사람들이 믿고 있던 의식 바깥의 세상을 더 이해하도록 바랐던 걸지도 모른다. 

이미지 01 - 포스터. 전시 리플릿 자료 中.


사진의 역사에 이름을 남긴 여성 사진가를 꼽는다면 누가 있을까? 미국 대공황 시대에 농업 안정국(FSA)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이민자 어머니]를 남긴 도로시아 랭(Dorothea Lange)을 떠올릴 수도 있고, 20세기 중반 빠르게 변화하는 뉴욕 풍경을 기록한 베레니스 애벗(Berenice Abbot)을 말할 수도 있을 테다. 기형이나 소수자와 같은 사람들을 주로 담은 다이앤 애버스(Diane Arbus)와 자신의 아이들을 찍은 [직계 가족] 시리즈로 잘 알려진 샐리 만(Sally Mann) 또한 많이 알려진 여성 사진가들이다.


물론 지난 이백여 년 동안 활동한 여성 작가들을 여기서 모두 언급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신 독일의 예술사가 보리스 프리드발트(Boris Friedewald)가 2018년에 쓴 <여성 사진가들 (Women Photographers)>이라는 책을 보자. 이 책은 사진사에 발자국을 남긴 55명의 여성 사진가들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데, 아래와 같은 부제가 붙어있다. 


“줄리아 마거릿 카메런부터 신디 셔먼까지 (From Julia Margaret Cameron to Cindy Sherman)” 


줄리아 마거릿 카메런은 19세기 중, 후반 픽토리얼풍의 이미지를 주로 만든 작가로 사진사 초기에 이름이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여성 사진가 중 한 명이다. 그럼 반대편에 있는 신디 셔먼은 누구일까? 셔먼은 1954년에 태어난 미국 사진가로 70년대 후반 사진을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활발히 활동 중인 대표적 여성 작가이다. 

셔먼의 이름이 부제에 붙은 것은 그녀가 단순히 후대 사진가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신디 셔먼은 남녀 사진가를 통틀어 상업적으로 가장 크게 성공한 이들 중 한 명이며 1), 현대 사진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가이기도 하다. 포스트모더니즘, 젠더와 페미니즘 이슈 등 다양한 주제를 아우르는 그녀의 작품들은 상업적으로나 예술적 가치로나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프리드발트는 셔먼과 그녀의 작품이 예술계에서 차지하는 이와 같은 영향력을 고려하여 부제를 정하지 않았을까.  


이미지 02 - 설치 전경.


베이징에 있는 루이뷔통 재단의 문화 공간, Espace Louis Vuitton Beijing에서는 지난 10월 말부터 <신디 셔먼 : 온 스테이지 (Cindy Sherman : On Stage)> 전시가 진행 중이다. 이번 전시는 파리에서 열렸던 회고전 <”Cindy Sherman at the Fondation”>의 작품 중 일부를 가져온 것이다. 작품 수가 아주 많지는 않지만 가장 유명한 시리즈인 [무제 영화 스틸 (Untitled Film Stills)]의 오리지널 프린트부터 최근의 [태피스트리 (Tapestries)] 시리즈까지 사십여 년이 넘는 작가의 작품 세계를 폭넓게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전시장에서 상영 중인 파리 회고전 소개 영상을 통해 셔먼의 작품을 조금 더 접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지금의 신디 셔먼을 있게 한 작품은 1977년에서 1980년 사이에 만든 [무제 영화 스틸] 시리즈이다. 2) 영화 홍보를 위해 만든 스틸 사진(film still)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셔먼은 우리가 한 번쯤 보았음직한 가상의 인물과 상황을 창조했다. 그런 뒤 자신이 직접 그 인물로 분장을 하고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왠지 익숙하게 느껴지는 프레임 속 인물들은 팜므 파탈일 때도 있고, 오피스 걸이기도 하며 때로는 가정주부이기도 하다. 그녀들을 보고 있으면 언젠가 스쳐 지나갔던 영화의 한 장면을 되새기는 듯한 느낌도 든다. 3) 이처럼 익숙한 인상 덕분에 관람자는 사진 속 인물(혹은 그 인물이 보여 주는 직업)이 갖고 있는 특징(전형성)을 쉽게, 즉각적으로 인식한다. 4) 


이미지 03 - "무제 영화 스틸" 설치 전경.


그런데 이러한 인식은  잠시일 뿐이다. 셔먼이 찍은 카메라의 시선은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첫 순간을 지나면 곧 이질적으로 다가온다. 그녀가 우리가 알고 있던 ‘전형 (stereotype)’을 비틀었기 때문이다. [무제 영화 스틸]의 이미지들은 내가 믿고 있던 것이 과연 세상의 진짜 모습이었나라는 의심이 들게 한다. 수많은 미디어를 통해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 ‘전형성’이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던  것일까? 그녀가 창조한 장면들이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도 그래서일 것이다. 신디 셔먼은 이 시리즈를 통해 예술계와 대중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렸고, 이후 사십여 년간 계속된 예술가의 삶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미지 04 - "무제 영화 스틸 #22”, 1978. ©2021 Cindy Sherman. 전시 리플릿 자료 中.


셔먼은 [무제 영화 스틸]의 성공 이후 계속해서 새로운 작업을 선보였다. 컬러 사진을 찍으며 흑백의 형태와 톤으로 만드는 감정에서 나아가 색을 통한 인상을 만들었고, 자신의 작품이 비싸게 팔리는 것을 보며 오히려 역겨움을 불러일으키는 사진을 찍기도 했다. (과연 이런 작품도 살 수 있나 보자는 의도였다.) 전형적인 패션의 아름다움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하기도 하고, 오직 남자로만 분하여 시리즈를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2021년인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사진사가인 데이비드 컴퍼니(David Campany)는 프레임 속 시공간을 넘어 확장될 수 있는 장면을 담고 있는 사진을 “내러티브적”이라고 했다. 5)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셔먼의 사진은 매우 “내러티브적”인 사진이다. 그녀는 관람자가 프레임 속 가상의 인물에 대해 무언가를 느끼고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랐는데, 직접 모델이 되어 자신이 창조한 인물로 완벽하게 변신했다. 모델뿐만 아니라 감독, 메이크-업 아티스트와 조명 및 현장 연출가까지 도맡아 한 셔먼은 스스로 새하얀 캔버스가 되어 그 위에 수백 개의 서로 다른 자아를 덧입혔다. 6) 그래서 셔먼이 재현한 현실과 마주한 관객은 (사진가가 아닌) 허구의 인물에만 집중하며, 그 인물이 막 내뱉으려고 하는 "내러티브"를 떠올려 보게 된다. 사진 바깥의 (off-stage) 존재를 응시하는 여인의 표정과 화려한 분장 뒤에 가려진 광대의 눈빛이 프레임 속 사람의 목소리에 자연스레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이미지 05 - 태피스트리 시리즈 중 "무제 #617”, 2020. ©2021 Cindy Sherman. 전시 리플릿 자료 中.


그리고 셔먼은 모든 작품의 제목을 무제(Untitled)로 붙였다. 이는 작가가 처음부터 지금까지 지켜온 원칙으로 개별 이미지는 언제나 "무제 + 번호"의 이름을 부여받았다. (그나마도 초기에는 시기에 따라 번호를 붙였지만 이후에는 순서도 일정하게 따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작업을 묶는 시리즈 제목(필름 스틸, 센터폴즈, 광대 등)을 빼면 텍스트를 통해서 다른 의미를 찾을 수는 없다. 셔먼은 이러한 작명을 통해 모호성(ambiguity)을 강조하려 했는데, 사람들이 텍스트를 배제하고 오직 이미지만을 보면서 생각하기를 원했다. 셔먼은 또 카메라 앞에서 감정 표출을 절제하고 무표정함을 유지했는데 표정에서 드러날 수 있는 선입견을 줄이고, 동시에 모호한 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셔먼의 개별 이미지는 독자적인 자기만의 "내러티브"를 갖게 되었다. 


사진 평론가 진동선 선생님은 1995년의 잡지 기고에서 신디 셔먼의 사진, 퍼포먼스, 제작 방식과 전시 스타일, 그리고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70년대 후반부터 20여 년 동안 거의 변화하지 않았다고 평했다. 7) 나는 이러한 해석이 그때부터 다시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셔먼의 작품을 관통하는 특징은 일반적인 ‘전형성’을 꼬아 창조한 그녀만의 ‘전형성’이다. 한 번쯤 보았음직한 인물과 상황을 조금씩 비틀어 창조한 프레임 속 순간은 그 안의 인물이 응당 가지고 있어야 할 아름다움의 전형에서 벗어나 있다. 작가는 이를 통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고, 관객은 사진 속 그녀/그의 표정과 몸짓, 작은 소품과 배경이 무엇을 의미할지 고심하게 된다. 셔먼이 만든 영화 속 장면들([무제 영화 스틸]), 사진으로 재현한 클래식한 그림들([무제 역사 인물화 (Untitled History Portraits)]), 진하게 분장한 광대의 표정([무제 광대 (Untitled Clow)])나 필터를 이용해 변형한 인스타그램 이미지([무제 태피스트리 (Untitled Tapestry)])가 즉흥적인 인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에 그치지 않고 보는 이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촉매가 되는 것이다.


이미지 06 - 설치 전경.


신디 셔먼에 대한 A-Z를 정리한 한 기사는 그녀의 커리어를 하나의 거대한 병치(a huge juxtaposition)로 규정했다. 예술계를 지배하는 자본에 저항했지만 가장 많은 돈을 버는 중 작가 중 한 명이 되었으며, 전형적인 아름다움에 반기를 들었지만 고급 패션 브랜드와 협업했다. 자화상이 아닌 자화상을 찍었고 (self-portraits that should be viewed as anything but that), 적극적인 페미니스트가 아니었지만 그녀의 작품은 누구보다 많이 페미니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8) 


하지만 어찌 보면 모순이라고 할 수 있는 셔먼의 삶은 어찌 보면 꾸준히 일관되었다. 자신은 언제나 다른 쪽(the other side)에 끌렸었다고 고백한 셔먼은 9) 지난 사십여 년간 미묘한 이질감이 느껴지는 인물과 장면을 끊임없이 창조했다. 이렇게 만든 이미지들은 관객의 마음속에 기묘한(주로 불편한) 감정을 불러오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도록 촉진한다. 10) 셔먼은 이러한 순간을 통해 사람들이 믿고 있던 의식 바깥의 세상을 더 이해하도록 바랐던 걸지도 모른다. 


십여 년 전에 셔먼의 사진집을 한 장 한 장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감상한 적이 있다. 사진을 계속 보고 싶어서 모든 페이지를 스캔하기까지 했었는데, 이렇게 좋아했던 작가의 오리지널 작품을 볼 행운이 찾아올 줄은 몰랐다. 덕분에 셔먼의 작업을 새롭게 들여다보고, 생각하고, 감상할 시간을 가졌다. 십 년 전에는 사지 못했던 사진집을 사서 다시 한번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셔먼은 때론 자기 자신도 작업의 목적을 정확히 정의할 수 없다고 말했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난 세월 동안 그녀의 자아는 점점 더 다양해졌고, 그 앞에 선 우리에게 더 많은 생각의 거리를 던져 주고 있다는 것 말이다. 




각주 : 

1) 그녀의 작품들은 예술품 경매 시장에서 몇 십억 원의 판매가를 기록한 적도 있다.

2) 이 시리즈는 총 70 점의 흑백 사진으로, 뉴욕 현대 미술관(MoMA)에서는 1995년에 시리즈 전체를 1백만 달러에 구입하기도 했다. - Anna Freeman, “Your ultimate guide to Cindy Sherman”, Dazed Digital, 2016-08-03. - https://www.dazeddigital.com/photography/article/32147/1/your-ultimate-guide-to-cindy-sherman

3) 하지만 셔먼의 작업이 특정한 영화를 모방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4) 전시 리플릿, Fondation Louis Vuitton, 2021

5) 쿠엔틴 바작 등 역음, 이민재 옮김, <모마 포토그래피 : 1960 - NOW>, 알에이치코리아, 2017, p. 110 - 113

6) Boris Friedewald, [Women Photographers], Prestel, 2018, p. 194 - 197

7) 진동선, <현대 사진가론>, 태학원, 1998, p. 37

8) Anna Freeman, “Your ultimate guide to Cindy Sherman”, Dazed Digital, 2016-08-03

9) Ian Jeffrey, [How to Read a Photograph], Thames & Hudson, 2019, p. 392 - 397

10) 셔먼은 1981년에 만든 [센터폴즈] 시리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사람들이 정말 불편하게 느끼길 바랐다고 말하기도 했다. - MoMA 2012년 전시 Audio Guide - https://www.moma.org/audio/playlist/261/3359



기타 참고 자료 : 

- 전시 리플릿, Fondation Louis Vuitton, 2021 

- Cindy Sherman, [The Complete Untitled Film Stills], The Museum of Modern Art, 2019 (Chinese version) 

- Cindy Sherman, Amanda Cruz, [Cindy Sherman : Retrospective], Thames & Hudson, 1997

- 정훈, <포스트모던 이후의 사진풍경>, 눈빛, 2020, p. 45 - 48 & p. 110 - 119 

- 어윤지, "신디 셔먼 - 매체, 젠더, 그리고 몸>, 아트렉처, 2021-07-25, https://artlecture.com/article/2400

- MoMA Artist page - Cindy Sherman - https://www.moma.org/artists/5392#works 



전시 일정 : 

- 2021. 10. 31 ~ 2022. 03. 06 / 월 ~ 일 11:00 ~ 19:00 

- Espace Louis Vuitton Beijing (路易威登北京 ESPACE 文化艺术空间 : China World Shopping Mall South Zone W. Bldg., 1 Jianguomenwai Ave., Beijing) 

https://www.louisvuitton.cn/zhs-cn/magazine/articles/espace-louis-vuitton-beij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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