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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운 바위풀 Jan 13. 2022

시대와 국경을 가로질러 교차하는 삶의 풍경

두 다큐멘터리 사진가의 이야기

시각예술 플랫폼 아트렉처에 기고한 리뷰(https://artlecture.com/article/2620)입니다.


강산이 두 번은 변했을 세월을 뛰어넘은 김선재의 이미지들은 여전히 단단합니다. 프레임 속 묵직함 기운이 잊혔던 시대를 소환해 주거든요. 충청도의 평야를 가로지르는 작은 열차 안에 펼쳐진 삶의 풍경들. 아이부터 노인까지, 학생부터 일꾼까지, 스물일곱 젊음이 만난 이야기들 앞에서 자연스레 우리 시대의 삶을 떠올려 보게 됩니다. ......

그래도 왕푸춘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기차가 싣고 달리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으며 수십 년 동안 기차에 올랐지요. 그렇게 왕푸춘이 달린 거리는 중국 대륙을 몇십 번이나 돌고도 남을 겁니다. 그러면서 그의 사진집 제목처럼 <십억 개의 여행>을 기록했어요. ......

우리는 사진을 보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투영합니다. 이미지 위로 오래된 기억을 겹쳐 보며 나의 세상과 프레임 속 세상이 만나는 경험을 하지요. 김선재의 장항선과 왕푸춘의 화차에 올라탄 삶들은 이러한 경험의 매개체가 되어 줍니다. 그곳이 1998년의 장항이 되었든, 혹은 1977년이나 2015년의 중국이 되었든 크게 다르지 않아요. 그 앞에 서면 자연스레 우리가 헤쳐 왔던 시대의 모습을 되새기게 되지요. 모두 묵묵히 세상을 기록한 두 명의 다큐멘터리 사진가 덕분입니다. 


화가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안으로 들어갑니다. 마음속에 펼쳐진 풍경을 화폭으로 옮기기 위해서요. 사진가는 이미지를 담기 위해 바깥으로 나아갑니다. 세상에 펼쳐진 풍경을 프레임에 담기 위해서지요. 두 발 딛고 선 시대의 모습을 담는 이들을 우리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라 부릅니다. 기록하는 일이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이라도 되는 마냥 묵묵히 걸어가는 그들의 발자국은 절로 고개를 숙이게 만들지요. 



여기 두 명의 다큐멘터리 사진가가 있습니다. 한국의 사진가 김선재와 중국의 사진가 왕푸춘입니다. 한데 살아온 시대도, 장소도 달랐던 두 사람이 바라본 곳은 같았습니다. 그곳은 다름 아닌 ‘기차’입니다. 왕푸춘은 사진가가 되기 전에 십수 년 동안 철도원으로 일을 했습니다. 자연스레 기차로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지요. 왕푸춘의 렌즈는 사십여 년 세월 동안 레일을 따라 펼쳐진 대륙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기록했습니다. 



반면 김선재의 시간은 조금 다릅니다. 그의 사진들은 흘러가는 세월 한 자락을 떼어내어 품고 있거든요. 때는 1998년 11월이었습니다. 충남 천안과 장항을 잇는 장항선. 작가는 거기 사람들이 아니면 이름조차 생소한 선을 따라 달리는 기차에 올랐습니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사람들을 실어 나르던 비둘기호 열차의 마지막 한 달을 기록하기 위해서였지요. 



아마 한국과 중국의 두 사진가는 서로를 알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이 똑같이 알고 있던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둘은 자신의 렌즈가 어디를 향해야 할지를 알았어요. 바로 사람들의 ‘삶이 벌어지는’ 곳이었지요. 두 사람에게 그곳은 기차였습니다. 



어릴 적, 명절에 기차를 타면 객실 내 복도까지 사람들이 그득했습니다. 당시에는 입석 표도 팔았는데, 군인 아저씨들이 할머니나 어린아이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기도 했고요. 객차 사이 통로까지 빽빽한 사람들과 담배 연기에 잠깐 졸도하는 아가씨를 본 적도 있습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영화 한 편 보며 쉬어 가는 요즘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이지요. 



그럼 김선재가 담은 장항선과 왕푸춘이 찍은 대륙의 열차는 어떤 풍경을 간직하고 있을까요? 



<장항선 비둘기>는 김선재가 스물일곱에 찍었던 작업입니다. 그러니 무려 23년이나 지나서 세상에 선보이는 건데요. 코로나로 하던 일이 여의치 않아지면서 오히려 옛 사진을 정리할 기회가 생겼다고 하니 슬픈 아이러니지요. 



그의 여정은 1998년 11월 4일 저녁, 천안발 장항행 비둘기호에 오르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한 달 뒤인 12월 1일 새벽, 첫 번째 운행을 마친 장항발 천안행 통일호 열차에서 내리며 끝나요. 작가는 그 시간 동안 마주친 풍경을 33통의 필름에 충실히 눌러 담았습니다. 



<장항선 비둘기>는 김선재의 사진이 아니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삶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그곳에는 아빠 손에 매달려 있는 아이와 희미한 플랫폼 불빛에 기대 책에 빠진 소녀와 해산물이 가득한 다라이를 이고 열차에 오르는 어머니가 있지요. 그리고 이들의 이야기가 무사히 흘러가도록 지켜 주는 철도원들이 있습니다. 운행을 준비하는 새벽녘 그림자에는 기차에 오른 삶들과 함께 나눠진 시간의 무게가 배어 있는 듯하지요. 



강산이 두 번은 변했을 세월을 뛰어넘은 이미지들은 여전히 단단합니다. 프레임 속 묵직함 기운이 잊혔던 시대를 소환해 주거든요. 충청도의 평야를 가로지르는 작은 열차 안에 펼쳐진 삶의 풍경들. 아이부터 노인까지, 학생부터 일꾼까지, 스물일곱 젊음이 만난 이야기들 앞에서 자연스레 우리 시대의 삶을 떠올려 보게 됩니다.



언젠가 기회가 닿는다면 그가 찍었다는 33통, 937점의 사진을 모두 보고 싶습니다. 그걸 보고 있으면 왠지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아요. 



<장항선 비둘기> 편집 영상 by 김선재 : https://fb.watch/avdeQFoQds/




중국의 왕푸춘이 사진을 찍기 시작한 건 1970년대입니다. 철도원으로 일을 하다가 정식으로 사진 공부를 하면서 전업 작가가 되었는데요. 작년 초에 그의 부고 소식이 중국의 주요 언론에 실렸습니다. 한 예술가, 그것도 사진가의 부고가 언론에 나오는 것은 드문 일이라 하니 그가 받은 관심을 짐작할 수 있지요. 



왕푸춘은 기차 안에 작은 사회가 펼쳐져 있다고 말했는데요. 사십여 년 동안 셀 수 없이 기차에 오르며 만난 풍경은 문자 그대로 대륙의 축소판이었습니다. 그 안에선 좌석이 없어 객차 사이 통로에서 몸을 밀착한 노동자 가족과 고급 옷과 시계에 최신형 휴대폰을 갖춘 사업가가 공존하고 있었지요. 사진 속에는 대륙을 흘러간 변화의 물결도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딱딱한 의자에 앉아 마작을 두며 시간을 때우는 노동자들의 풍경은 1등 칸 좌석에 기대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이어지지요. 왕푸춘의 렌즈는 자신과 가족을 일으키기 위해, 또 중국을 일으키기 위해 움직였던 삶들의 이야기와 시대의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이 중국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기록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고 합니다. 시대가 변하면서 카메라를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도 달라졌고요. (2015년 촬영 때 펀치를 맞은 후유증으로 계속 흔들리는 이빨을 안고 살았다고 하지요.) 사람 냄새가 진하게 밴 풍경은 어딘가 딱딱한 장면으로 변했거든요.



그래도 그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기차가 싣고 달리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으며 수십 년 동안 기차에 올랐지요. 그렇게 왕푸춘이 달린 거리는 중국 대륙을 몇십 번이나 돌고도 남을 겁니다. 그러면서 그의 사진집 제목처럼 <십억 개의 여행>을 기록했어요.



<One Billion Journeys> 사진집 보기 :

https://youtu.be/17FJJRtXbEc




우리는 사진을 보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투영합니다. 이미지 위로 오래된 기억을 겹쳐 보며 나의 세상과 프레임 속 세상이 만나는 경험을 하지요. 김선재의 장항선과 왕푸춘의 화차에 올라탄 삶들은 이러한 경험의 매개체가 되어 줍니다. 그곳이 1998년의 장항이 되었든, 혹은 1977년이나 2015년의 중국이 되었든 크게 다르지 않아요. 그 앞에 서면 자연스레 우리가 헤쳐 왔던 시대의 모습을 되새기게 되지요. 모두 묵묵히 세상을 기록한 두 명의 다큐멘터리 사진가 덕분입니다. 




덧. 김선재 사진가님의 작업은 2021년에 온빛 다큐멘터리 사진상을 받았습니다. 서울에 있는 갤러리 류가헌을 시작으로 하여 대구(아트스페이스 루모스)와 광주(갤러리 혜윰)에서 다른 수상자분들과 함께 순회 전시를 할 예정이니 관심 있는 분들은 꼭 찾아가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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