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언제 맛보아도 달짝지근한 그 맛, 첫사랑

by 와이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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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트 라이브즈> 시놉시스


12살의 어느 날, '해성'의 인생에서 갑자기 사라져버린 첫 사랑, '나영'. 12년 후, '나영'은 뉴욕에서 작가의 꿈을 안고 살아가다 SNS를 통해 우연히 어린시절 첫 사랑 '해성'이 자신을 찾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 한 번의 12년 후, 인연의 끈을 붙잡기 위해 용기 내어 뉴욕을 찾은 '해성'. 수많은 "만약"의 순간들이 스쳐가며, 끊어질 듯 이어져온 감정들이 다시 교차하게 되는데...

우리는 서로에게 기억일까? 인연일까?





비일상의 일상


미리 밝혀둔다. 나는 이 이야기가 무척 재미없었다. 영화가 끝난 후에 '대체 무슨 상 후보에 그렇게 많이 노미네이트 됐다는 건가.'싶어서 수상 목록을 뒤져봤을 정도다. 로튼 토마토의 신선도 점수가 무러 96%였다. 사람마다 취향과 감상은 다른 법이니 어쩔 수 없지.


다만 이 작품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떤 부분을 사랑했는지는 알 것 같다. 내가 이 작품이 어색했던 것은 첫째, 상업영화다운 갈등이나 밀도감이 없어서였고, 둘째, 한국어가 정말 끔찍하게 어색했기 때문이다.


패스트002.jpg 솔직히 이런 얼굴이면 쳐다보고만 있어도 유잼이긴 하겠지만...


이 작품에는 큰 갈등이 없다. 갈등이 없으니 사건도 없다. 모든 장면이 대화로 가득 차 있다. 그 대화 속에서 엿볼 수 있는 인물의 감정은 그 폭이 매우 좁아서,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밋밋하기 그지 없다. 정말 재미없는데 장황하기만 해서, 지금 듣고 있는 부분이 기승전결의 어느 부분인지, 끝이 있긴 한건지 알 수 없는, 맹숭맹숭한 이웃집 아저씨의 궁금하지 않은 군대 이야기를 듣고 있는 기분이 든다.

인물의 감정 역시 일관되어있다. 크게 기뻐하지도 않고, 크게 슬퍼하지도 않는다. 그러잖아도 감정의 고저가 없는데, 대사와 대사, 행동과 행동 사이의 간극은 너무 커서, 보다가 내가 먼저 숨이 넘어갈 것 같다.


그리고 한국어는 도무지 일상 언어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이건 배우의 연기가 문제가 아니라, 각본의 문제다. '노라'는 '해성'을 '한국인다운 한국인'이라고 평했다. 가장 한국사람 같다고. 무슨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을. 당장이라도 유창한 영어가 술술 나올 것 같은 얼굴의 '해성(유태오)'이 '나이스 투 미츄' 조차 엉성한 발음으로 더듬더듬 말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그것만큼 어색한 광경도 없다. 아니, 그리고 배우를 떠나서, 명문대생으로 설정을 해 놓고 나이스 투 미츄조차 더듬거리면 좀 문제가 있지 않을까? 한국의 명문대생을 어떻게 생각하는 것인가. 그들은 원어민도 풀지 못하는 극악의 수능 지문을 뚫고 합격한 이들이란 말이다.


하여튼 이런저런 이유로 이 영화는 정말 재미가 없다.

그래서 이 영화가 별로였는가? 그건 또 아니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일상은 영화에서와 같은 갈등과 위기는 없다. 이 영화는 일상의 풍경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을 뿐이다. 실제 사람은 배우처럼 감정을 불같이, 성난 파도같이 쏟아내지 않는다. 아주 미묘한 눈빛, 술김에 툭 내뱉는 말, 무의식중에 하는 행동들에서 감정과 진실이 숨어 있다.


이 영화가 그렇다. 끔찍하게 어색하고 낯선 대화와 몸짓들은, 어찌 보면 당연한 '현실'이다. 주인공인 두 사람은 겨우 초등학생 때 만났다가 헤어진 사이이고, 애틋함과 별개로 열열하게 사랑하는 것도 아니며, 무려 24년 만에 다시 만났다. 단순히 세월을 떠나서, 이제 막 사회와 관계를 알아가는 어린아이의 첫 시작에 처음 만나, 알 것 다 아는 30대의 성인이 되어 재회한 것이다. 관계도, 익숙해진 문화도, 신념도 다 바뀌었다. 전혀 다른 '남'인데, 그럼에도 첫사랑의 애틋함만은 남아있는 아이러니. 그 끔찍한 어색함은 당연한 결과다.


내게 익숙한 '영화'의 문법과도 표현과도 다르지만, 그것은 이 작품이 지극히 '일상'에 닿아있기 때문이다.

낯설고 생경한, 어색하고 답답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담담한 이야기는, 언뜻 비일상처럼 느껴지지만, 노골적으로 일상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을 따름이다.





일상의 비일상



내게 지루함을 안겨준 이 영화는, 하나하나 자세히 분해하여 뜯어보면 사실 어느것 하나 빠지는 부분이 없다.

그 중에서도 가장 손에 꼽을 부분이라면, 영상과 음악, 음향이었다.


이 영화의 장면은 모두 꿈결처럼 아름답다. 노을의 색감, 필름 카메라로 찍은 것 같은 도시의 전경, 추억 보정 넉넉히 들어간 가파른 골목길, 도시의 회전목마... 특히 '서울'의 풍경은, 여기가 내가 사는 그 도시가 맞나 싶을 정도로 낯설고도 아름답다. 이것은 예술가가 바라보는 풍경이어서일까, 타인이 바라보는 풍경이어서일까. 감독은 가장 일상적인 이야기를, 가장 비일상적인 장면에 담아 우리에게 건네준다.


패스트003.jpg 추억보정 탓인가... 낭만적으로까지 보이는 언덕길


음악도 좋다. 요란한 음악은 단 하나도 없이, 어른이라면 반드시 품고 있을 '첫사랑'을 향한 애틋한 무언가를 자극한다. 음향 역시 그렇다. '일상 소음'을 마치 음악처럼 다룬다. 이 감독은 '삶'을, '일상'을 참 아름답게 바라본다. 모든 장면이 서정적이다. 문학 작품을 읽는 듯하다.


더하여 모든 인물들이 '우아'하다.

실비집에서 새벽까지 술을 퍼마시는 대학생 친구들도, 달동네에 사는 부모님도, 하다 못해 '노라'가 학교에서 함께 스터디하는 친구들마저도, 마치 종이에 그려진 사람들처럼 느껴진다. 그나마 가장 감정을 드러내는 인물이 '노라'의 남편인 '아서'였는데, 그마저도 우아하고 품위가 넘친다. 질투라는 건 좀 더 추잡하고 질척질척해도 될 것 같은데 - 물론 이 이야기의 주제를 생각하면, 남편의 질투야 주요 요소가 아니니 담백하게 넘기는 게 맞겠지만 - 그 질투마저도 미묘한 표정 변화, 말과 말 사이의 간극, 시선 같은 것에서 찾아내야 한다.

작위적인 캐릭터성이 없는 것은 일상을 이야기하는 이 영화에 참 어울리는 일이나, 그렇게하여 통일된 정서가 '우아함'이라는 것은 꽤 재미있는 부분 같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



패스트004.jpg 누군가와의 인연은 이어지고, 누군가와의 인연은 엇갈린다.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주제는 '인연'이다. 감독이 불교에 꽂혔구나...싶을 정도로, '인연'이나 '윤회'나 '전생'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해성'과 '나영(노라)'의 인연은 여러번 교차했음에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어쩌면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더 아름답고 애틋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모두의 마음 속에 '첫사랑'이라는 것은 그저 아름답고 청량하게 남아있는 것이리라.


영화를 보기 전에는 '패스트(past)'가 이들이 처음 만난 어린 시절을 이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택시를 타기 전에 했던 '해성'의 대사를 들으며, 어쩌면 지금 관객이 숨죽여 지켜보는 바로 이 순간이 이들의 과거이고 전생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문어체의 대사 속에서도, 해성이 택시 앞에서 던진 그 대사는 참 소중하다.


작품에도 나오지만,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이 '옷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소맷자락이나 셔츠자락 같은 게 아니라, 한복에서 목 둘레를 동정으로 감싼 부분을 이른다고 한다. 목을 감싼 동정이 서로 닿으려면, 둘이 꽉 끌어안지 안고서는 불가능하다. 길 가다가 스치는 정도가 아니라, 서로 온 몸으로 끌어안을 수 있는 정도가 되어야 '인연'이라는 것이다.


24년이 흐른 후 두 사람이 뉴욕에서 다시 만났을 때, 두 사람은 굉장히 어색한 포옹을 나눈다. 특히 해성은 어떻게 해야 할지 어쩔줄 몰라한다. 두 사람이 헤어지던 때, 해성은 선뜻 다가가 나영을 끌어안아준다. 헤어진 후, 나영은 드디어 울음을 터뜨린다.


첫사랑은 그런 것이다. 나영의 대사처럼, 분명히 거기에 존재했으나 지금은 없는 것. 분명한 인연이지만, 교차할 뿐 이어지지 못한 어떤 것. 잡히지 않기 때문에 더욱 아쉽고 안타깝고 아름다운 것. 해성은 이루어지지 못한 두 사람의 순간이 '전생'이기를 바란다. 끝내 엇갈려 이루어지지 못한 두 사람의 '전생'이 옷깃을 스친 인연이 되어, 다름 생에서 또다른 인연으로 이어지기를. 그러나 그들의 삶은 '전생'이 아닌 '현실'이다. 다시한번 해성은 떠났고, 나영은 남았다. 또다시 엇갈려, 각자의 일상으로 되돌아갔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이 영화는 시종일관 담담하다. 갈등도 위기도 없다. 그저 차분히, 그 폭이 크지도 않은 인물의 감정을 따라갈 뿐이다. 결국 다시한번 교차해 멀어지는 인연을 지켜보기 위해서 말이다.


나는 여전히 이 영화가 재미있는 영화인지는 잘 모르겠다. 솔직히 OTT로, 집의 작은 TV로 보았다면 지루함과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고 중간에 껐을 것 같다. 그렇지만 좋은 영화인 것은 안다. 우리는 모두 마음 속에 다음을 기약한 '전생'으로 남겨두고픈 애틋한 사랑이 있을 테니까.


이루어지지 않아서 더 달콤쌉싸름한 그 첫사랑을 위해 서툰 언어로 말을 건네는 영화같다.

네가 나의 일상이 될 수 없는 줄 알고 있지만, 그저 다시 한번 보고 싶었어, 라고 말이다.






별점 (5개 만점)

★★★


아름다운 영상과 간질거리는 음악으로 무장한 초호화 오디오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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