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먹는 속도가 느려서요..
어릴 때부터 밥 먹는 속도가 느렸다. 허겁지겁 빠르고 맛있게 먹는 동생 옆에서 음식을 꼭꼭 씹어 천천히 먹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핀잔 아닌 핀잔도 꽤 들었다. 엄마 아빠는 가끔, 할머니는 명절 때마다 꼭 한 마디를 하셨다.
"동생 복스럽게 먹는 것 좀 봐라. 넌 왜 이렇게 깨작깨작 먹니?"
"좀 팍팍 좀 먹어라. 복도 없게."
"밥 언제까지 먹을 거니?"
처음에는 왜 밥 먹는 거 가지고 그러나 억울했지만 그 말들에 점점 익숙해졌다. 나중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페이스를 유지했다. 그런 말보다는 동생에게 맛있는 음식을 뺏기는 것이 문제였다. 엄마가 같이 먹으라고 준 음식 중 3분의 2는 동생의 것이었다. 두고두고 천천히 먹고 싶은데, 속도로도 양으로도 동생은 나를 앞섰다. 그런 현상을 본 엄마는 동생에게 음식을 더 챙겨주기도 했다. (음식을 해준 사람(=엄마) 입장에서도 복스럽게 먹는 사람에게 하나라도 더 주고 싶었을 거다.) 이럴 때는 내가 그나마 누나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어린 내가 찾아낸 생존전략은 접시에 음식을 미리 덜어두는 것이었다. 엄마가 떡볶이를 끓이면 그 속에 하나뿐인 달걀을 동생이 쏙 먹어 버릴까 봐 숟가락으로 반을 갈라 앞접시로 가져갔다. 순두부찌개에 새우가 5마리 있으면 2마리를 가져온다. 이렇게 가져오지 않으면 동생이 겨우 한 개 남겨놓고는 '아 누나 미안, 몰랐어.' 할지도 몰랐다. (우리 집 순두부찌개는 찌개보다는 국에 가까운데, 통통한 새우가 들어간다.) 그렇게 밥을 먹을 때마다, 동생은 참전하지 않은 동생과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더 큰? 문제는 학교에서 급식을 먹으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친구들은 떠들면서도 식판을 빠르게 비웠다. 나는 최소한의 리액션만 하면서 밥을 열심히 먹어도 어느샌가 고개를 들면 친구들은 다 먹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친해진 후에야 친구들이 나와 밥 먹는 속도를 맞춰주었지만, 초반에는 부담스럽고 미안해서 먹다 말고 중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농부님들 죄송합니다..) 자연스레? 밥 먹는 양이 줄어들면서 160cm도 안 되는 키에 43kg까지 살이 빠졌다.
그렇게 나는 새로운 학년에 올라갈 때마다, 새로운 학교에 갈 때마다 살이 빠졌다 쪘다를 반복했다. 친구들에게 '나 사실 밥 먹는 속도가 많이 느려. 금방 다 먹을게, 잠시만!'이라고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열심히 친구들과 속도를 맞추었다.
지금에 와서 그때의 친구들을 만나면 자연스레 나와 속도를 맞춰주는 이들이 있다. 그러면서 '야, 나 이렇게 밥 천천히 먹는 거 너무 오랜만이야. 너 정말 여전하다.'라고 말한다. 밥을 빠르게 먹는 사회생활을 하다가 종종 이들을 만나면 나는 마음 놓고 꼭꼭 씹어 먹는다. 내가 다 먹을 쯤에, 그들도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그들에게 느낀 고마움을 일기장에 쓰던 어느 날, 나도 누군가의 느린 속도에 발을 맞추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라고 다짐했다. 모든 게 정신없이 빠르게 흘러가는 요즘을 살다 보면 느린 사람들을 잊기가 십상이다. 사회의 빠른 속도를 따라가는 게 살이 빠질 만큼 힘든 사람은 없는지 주변을 둘러보고, 그들이 마음을 놓을 수 있도록 그걸 알아주고 맞추어 주는 사람이 되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