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논리의 대화가 많았으면 좋겠다.
영화 <소공녀>에서 헌혈을 하던 주인공 남녀가 아래와 같은 대화를 나눴다.
남자: 우리 이거 끝나고 요 앞에 순대랑 떡볶이 먹으러 갈까?
여자: 응!
남자: 피 뽑았으니까, 철분 보충!
여자: 좋아!
‘응? 떡볶이가 철분 보충에 좋았나..?’라는 생각이 스치며 귀여운 대화에 미소가 지어졌다. 사실 순대랑 떡볶이는 철분 보충과 큰 상관이 없다. 철분을 보충하려면 시금치, 부추를 먹으러 가야 한다. 그러니까 남자의 말에서 '철분 보충'은 헌혈 때문에 생긴 핑계고 네가 떡볶이와 순대를 좋아하니까 이거 끝나면 같이 먹으러 가고 싶은 거다. 논리도 인과관계도 없지만 둘만이 할 수 있는 대화이기에 매력적이었다.
첫 번째는 ‘너에 대한 정보'다. 네가 떡볶이와 순대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단순히 아는 것을 넘어 기억해야 한다. 온라인을 통한 소통이 증가하면서 우리는 수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살고 있다. (카카오톡 채팅방이 몇 개인가..) 그래서 그런지 서로의 취향은 별로 중요하지 않을 때가 많다. 금방 잊히고 휘발된다. 그 속에서 네가 좋아하는 것만큼은 꼭꼭 기억하려는 진심 어린 마음이 있어야 취향에 대한 정보가 머릿속에 저장된다.
두 번째 조건은 '네 취향을 함께 하고픈 마음'이다. 영화 <안녕, 헤이즐>의 원작 소설을 보면 완전히 다른 취향을 가진 남녀가 서로의 최애 책을 교환하여 읽는다. 하나는 액션물, 하나는 애절한 소설. 이들은 서로 함께하고 싶은 마음으로,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장르에 기꺼이 시간과 노력을 들인다. 이렇게 상대의 취향에 함께 하는 것은 새로운 세계에 입문하는 것과 같다. 어쩔 때는 용기가 필요하다.
즉, 큰 생각 없이 나눈 듯해 보이는 위의 대화는 역설적이게도 노력하는 관계에서 가능한 것이다. 네가 좋아하는 음식에 대한 정보와 그걸 함께하고픈 마음이 만나 맥락은 없지만 매력적인 대화가 탄생했다. 남이 들으면 저게 '무슨 말이야?' 할 수도 있지만, 아무렴 괜찮다. 우리만 이해하고 우리만 웃고 우리만 기분이 따뜻해져도 좋다.
요즘 우리가 나누는 대부분의 대화에는 철저한 논리가 있다. AI 스피커와 ‘만들어진’ 대화를 나누고, 알고리즘을 통해 '내가 좋아할 것 같은' 콘텐츠를 제안받는다. 온라인 상의 대화에서 긴 설명은 피로하니 필요한 말만을 논리 정연하게 정리해서 주고받는 편이 편하다. 척척 원하는 답변과 취향을 눈 앞에 가져다 주니, 밖에는 못 나가지만 일상이 더 내 맘대로 되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다.
그래도 나는 맥락 없는 대화가 더 많은, 그러니까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가볍고 느슨한 관계가 많아지고 있지만, 그런 와중에 노력하는 관계는 소중히 이어가고 싶다. 상대를 마음에 담고, 여러 순간에 함께하며, 우리만 이해할 수 있는 대화를 풍족하게 나누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