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화양연화>, <해피투게더>, <중경상림>, <아비정전>
당시 S와 나에게는 공통점 3가지가 있었다. 1. 영화 좋아함. 2. 와인 좋아함. 3. 무료함. 이런 우리에게 딱 맞는 모임을 발견해버렸는데, 바로 왕가위 영화와 와인을 페어링 하는 영화 모임이었다. 아직 왕가위의 영화를 한 편도 보지 않았던 우리는 ‘왕가위 영화를 보지도 않아 놓고 정녕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칭할 수 있는가’ 라는 일종의 부채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 부채감을 해소할 겸, 와인도 마실 겸,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볼 겸, 함께 신청하기로 했다. 모임은 총 4번, 우리가 볼 영화는 <화양연화>, <해피 투게더>, <중경상림>, <아비정전>이었다.
첫 영화는 <화양연화>. 보면서 대화 주제는 뻔하다고 생각했다. 장만옥과 양조위의 사랑을 정당하다고 볼 수 있는가? 불륜이라고 봐야 하는가? 뻔한 만큼 도파민 도는 주제이기도 했다. 아무튼 이들 사랑의 시작은 어느 정도 납득은 할 수 있겠으나, 불륜은 맞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며 첫 모임으로 향했다.
모임 장소는 모임장이 운영하는 ‘커리를 파는 2층짜리 작은 와인바’였다. 2층은 모임의 정원인 12명이 다 모이면 꽉 찰 만한 크기였다. 쓸데없이 성실했던 나는 모임 시간 10분 전에 도착했는데, 그날따라 하필이면 S가 지각을 하는 바람에 어색함을 온몸으로 느끼며 새로운 사람이 들어올 때마다 인사를 반복했다. 드디어 12명이 모두 모인 자리, 굉장한 동안 페이스의 모임장(이후 나이를 알고 너무 놀랐다.)이 자기소개를 시작하며 정적을 깼다. 2-30대의 우리는 말 그대로 각양각색이었다. 카메라 감독, 패션 회사 마케터, 약사, 사업가 등. 이 모임을 신청하지 않았더라면 어디서 쉽게 만날 수 없는 종류의 사람들이었다.
흥미로운 자기소개 후 우리는 (예상대로) 장만옥과 양조위는 불륜인가,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생각보다 첨예하게 대립했다. 서로의 배우자가 먼저 바람을 피웠으니, 이건 바람이라고 볼 수 없다는 파와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바람이 아니냐는 주장들. 각자의 과거까지 꺼내면서 대화를 하던 와중 드디어 주인장이 와인을 꺼내왔다. 강렬한 대화만큼 강렬한 색감의 레드 와인. (억지로 라임을 맞춰봤다.) 오후 4시쯤의 낮고 은은한 볕 덕분에 잔 속 레드 와인이 투명하니 예뻤다. 맛은 불륜만큼 씁쓸했다. 씁쓸함을 두 잔씩 나누며 주장의 간극은 줄이지 못한 채 그날의 모임은 마무리되었다.
이후 S와 나는 <해피투게더>, <중경상림>도 이들과 함께 나누었다. <해피투게더>와 탄닌감 높은 레드 와인을 페어링 하며 틀에 갇히지 않아 받아들여지기도 힘든, 텁텁하지만 진실한 사랑의 형태에 대해 이야기했고 <중경상림>과 산뜻한 화이트 와인을 페어링 하며 매력 넘치는 네 명의 청춘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시간은 훌쩍 흘러 드디어 마지막 영화, <아비정전>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나보다 살짝 윗세대들이 왜 그렇게 배우 장국영에 열광을 했는지, 그의 매력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영화였다. <아비정전> 속 일명 ‘나쁜 남자’ 장국영처럼 당도와 도수가 높은 화이트 와인과 함께였다. (모르겠다, 왠지 ‘나쁜 남자’는 ‘당도와 도수 높음’이 어울린다.)
마지막 모임이 아쉬웠던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 모임이 끝난 이후 따로 보지는 않을 관계라는 걸 서로 알았던 것 같다.) 편의점에서 파는 싼 와인과 안주를 사들고 한 모임원이 소개하는 아지트로 향했다. 정확히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기억이 선명하진 않지만, 서로의 일터와 그동안 나누었던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다시 보지 않을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라서 그런지 좀 더 편했던 것 같기도 하다. 어차피 내 이야기는 기억도 못 할 텐데 뭐.
12시쯤이 되자 슬슬 몇 명이 그만 가봐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S와 나를 포함한 6명이 새로운 장소를 찾아 아지트를 나왔다. 다수보다 소수가 편해서인지 소수로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살짝 취하니 간만에 어울리지도 않는 외향성이 튀어나왔다. 실실 웃으며 그들과 함께 빨간 색감의 포차로 들어갔다.
비가 애매하게 추적추적 오는 밤이었다. 빗소리가 들리는 포차의 한가운데 자리에 앉은 우리는 처음으로 와인이 아닌 소맥을 타 마시며 영화 이야기만 주구장창해댔다. 나름 꽤 영화를 많이 본 사람이라고 자부하는데, (대학 시절 교양 수업으로 <백 투 더 퓨처>,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글래스톤베리>, <이창> 등 고전 영화를 꽤나 보기도 했다.) 거기서 나는 6명 중에 6등이었다. 모르는 영화 이야기투성이였다. 당시 <외계인: 2부> 촬영을 하고 있던 카메라 감독님은 정말로 신기할 정도로 모든 영화를 알고 있었다. 그가 업계 뒷이야기를 곁들여 풀어내는 영화 이야기를 정신없이 듣다 보니 시간은 새벽 4시. 오후 3시부터 홀짝홀짝 마신 와인과 소맥이 섞여 잘 모르는 영화들인데도 어질어질 흥미로워서 시간이 그렇게 흐른지도 몰랐다. 그제야 우리는 이제 좀 졸려온다며 언젠가 또 보자는 기약 없는 인사를 나눈 후 각자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그날은 영화 보는 꿈을 꾸며 다음 날 느지막이 일어났다. (영화 보는 꿈을 꿨다는 건 뻥이다.)
예상대로 우리는 그 이후로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그게 아쉽냐? 하면 전혀 아쉽지 않다. S와 나는 태초의 목적대로 왕가위의 영화를 4편이나 본데다 감상까지 나누었고, 와인 4종을 새로 알게 되었으며, 다른 업종의 사람들을 만나 무료함을 풀었다. 4번뿐인 만남이었지만 영화 덕분에 대화는 다양했고 와인 덕분에 약간은 상기되었던 22년 여름의 진한 추억이다. 요즘도 양가위 영화를 보면 그 여름이 떠오른다. 좋은 영화들에 좋은 기억과 술을 연결해두길 정말 잘했다. - p.s. 모든 과정에 내향인과 함께해 준 또 다른 내향인 S에 고마움을 느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