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하는 일, 끝내하게 되는 일

당신은 '생존'하셨습니다.

by 김대능

요리사들이 분주하게 음식을 만들고 있다. 다양한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의 맛을 접시 위에 올린다. 게 중에는 다음 라운드로 진출하는 사람도 있고 곧바로 퇴장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그러다 TV속 한 요리사에게 내 시선이 꽂혔다. 비교적 단출한 요리를 내놓은 출연자였다. 심사위원이 요리를 맛보고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 순간 그녀가 숨을 삼키면 내 마음도 졸아든다. 마침내 '생존'이라는 단어가 경연장에 울려 퍼졌다. 그러자 그녀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다.


내 인생에도 저런 장면이 있었던가? 기억 속에서 내 생존의 순간들을 더듬어 본다. 회사로부터, 상사로부터, 동료로부터 나도 생존 판정을 받곤 했다. 그러나 나는 주저앉아 눈물을 흘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대표이사 앞에서 무사히 발표를 마쳤던 날, 핵심 과제를 수행해 좋은 고과평가를 받았던 날, 수년간의 평가 끝에 진급했던 날에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살아남았는데, 내 마음속에 피어났던 감정은 물겨운 감격이 아니라 일종의 안도감이었다. 뒤처지지 않고 남들처럼 살아간다는 사실에 대한 안도감.


곰곰이 생각해 봤다. 누군가를 주저앉게 만들고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것이 대체 무엇일까. TV를 보다 단어 하나가 맴돌았다. 바로 '끝'. 경연장에 울려 퍼졌던 심사위원의 말은 그녀에게 다가오던 끝을 저 멀리 밀어낸 듯 보였다. 생존이라는 그 한마디가 수많은 실패를 딛고 저곳까지 끌고 온 그녀의 꿈에 대한 따뜻한 위로가 아니었을까. 끝이 가까워짐에도 끝내 놓을 수 없던 꿈, 그 업(業)의 무게가 느껴지는 듯했다.


계속 TV를 응시했지만 생각은 이미 떠난 지 오래였다. 그간의 회사 생활 속 장면들을 돌려봤다. 내가 받았던 생존 판정은 달랐다. 그곳엔 꿈도, 끝도 없었다. 어쩌면 내 생존 판정은 끝을 없애주었다기보단 끝이 없는 길을 열어주었다. 사원에서 대리, 대리에서 과장, 과장에서 차장 그리고 부장으로 이어지는 머나먼 여정이다. 난 지금 어디쯤에 와 있을까? 10년을 달려왔지만 아직 끝이 보이지는 않는다. 아마 난 이 여정의 3분의 1 혹은 중간 지점 정도를 통과하는 중일 것이다.


내 하루는 '호출'로 가득했다. 메일이 부르고, 일정이 부르고, 회의실이 부르고, 누군가의 메시지가 날 불렀다. 그 과정에서 좋은 의견이나 아이디어는 종종 날 담당자로 만들었다. 또 괜찮다고 말한 만큼, 거절하지 못한 만큼 더 버거운 호출에 떠밀리기도 했다. 이는 내가 앞으로 같은 여정을 하는 한 똑같을 것이다. 그렇게 하루가 끝나면, 그날의 생존은 내일의 생존을 예약했다. 내가 한동안 커리어라 믿어왔던 길이다.


나는 그저 일했다. 월급이 나오고, 평가를 받았다. 때때로 즐겁기도 했지만 쉴 새 없었다. 내가 다음 라운드로 진출하지 않아도 다음 라운드는 계속해서 내게 밀려왔다. 정해진 기준을 넘기 위해 달렸지만, 기준을 넘는 순간 선을 다시 멀어졌다. 그 안에서 나는 늘 생존했지만 정작 내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반면 끝내하게 되는 일도 있었다. 음악을 만드는 일, 책을 펴내는 일, 누군가를 돕는 일 등 누가 보지 않아도 손이 가는 일들이다. 성과가 없어도, 당장 쓸모가 없어 보여도, 이상하게 마음은 그쪽으로 기울었다. 그런 일들을 할 때면 내일의 생존은 필요하지 않았다. 오늘은 그저 오늘로 끝나도 충분했으며, 그쪽으로 갈 때만 ‘살아남는 나’가 아니라 ‘살아있는 나’를 잠깐씩 만났다.


물론 살아남는 것도 중요하다. 일단 살아남아야, 살아있는 나를 느낄 여유도 생긴다. 하지만 살아남기만 하는 삶은 공허하다. 그것이 업(業)이 되어버리면 내 이름은 지워진다. 적어도 내 지난 10년은 그랬다. 나는 TV속 그녀가 부럽다. '생존'이라는 말 앞에서 무너졌기에. 나는 그 말 앞에서 늘 멀쩡했다.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O-yAf1l5xBc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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