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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내가 행복하지 않은 이유

원래는 행복했던 적도 있나

by Funny

행복하고 싶다. 나도 행복할 수가 있을까 라는 작지만 큰 소망으로 살아온 시간이 어언 13년쯤 되는 것 같다. 행복하지 않아서 이제 살고 싶지 않기도 했고 절망도 했고 행복하기 그지 없기도 했지만 요즘 나는 행복하지 않다.


참 이상한 일이다. 행복했던 적이 있다면, 나는 이미 행복에 다달으는 방법을 알고있다는 것이고 그 방법을 다시 실행하기만 하면 될 노릇이다. 그런데 행복하지 않다는 건 왜 일까.


대학원생이라는 것은 생각할 시간이 많다는 것이고, 나의 머릿속 한 켠에는 늘 이 물음이 자리하고 있다. 나는 왜 지금 행복하지 않는가. 손가락이 부러지고 다시 되찾은 행복이 부서지기 시작했으니, 손가락이 부러졌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명상을 게을리하기 시작하고, 운동도 못하기 시작하고서 행복하지 않기 시작하였으니 어쩌면 그것이 원인일 수도 있다. 손가락이 다 낳아서 다시 운동도 하고 명상도 잘 한다면 나는 행복의 길에 안착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어제는 오랫동안 보러가고 싶었던 듄2를 보러갔다. 논문 핑계를 대며 몸이 무거워 가지 못했지만 어차피 금요일에는 아무것도 못하는 역사가 벌써 몇 개월이니 그냥 포기하고 영화를 볼 심산이었다.


영화관에는 한국의 평일 영화관처럼 혹은 그보다 더 심하게 사람이 없었고, 한국에서는 느끼지 못할 감정인, 이중에 한명이 나를 습격하면 어쩌지 라는 걱정을 하며 긴 영화를 시청했다. 긴 영화의 상영시간은 리클라이너가 되고 따뜻한 난로기능까지 있는 미국의 엄청난 영화시트에서 시청했음에도 불구하고 두통과 피로를 가져다 주었다. 영화는 아름다웠으나 잔혹했고, 지나치게 현실감 있었으며, 오늘 악몽까지 꾼 걸보니 그들의 괴로움은 나에게 충분한 설득력이 있었던 것 같다.


영화관을 나설 때 친구에게 문자를 했다. 친구가 데리러 오겠다며 그러라고 했다. 영화관은 친구의 집에서 멀지는 않지만 조금은 거리가 떨어진 곳이었고 거리에서 습격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던 데다 부랑자들도 늘 거리에 있었기에 혼자서 돌아가는 것에 무서움이 없지 않았기 때문에 친구에게 폐끼치는 것은 싫지만 그렇게 했다. 핸드폰의 밧데리가 10퍼센트 였다. 큰일이다. 친구가 올때까지 기다릴 수 있을까? 7퍼센트, 아니 5퍼센트가 되었다. 1-2분 사이에 5%가 날아갔다. 나는 집에 돌아가는 길을 모른다. 친구의 답장은 큰일이야, 눈이 엄청와, 괜찮아? 라고 되어있었다.

(솔직한 심정은 화가 났다... 괜찮아? 너라면 괜찮겠니? 너 같은 겁장이라면 괜찮을까? 영화 끝나는 시간이야 검색하면 그냥 나오는 거고 내가 지금 끝나서 간다는데 괜찮아? 눈이 오니까 안오고 싶다는 거 잖아!!!)


10%에서 1-2분만에 5%가 되었다면 언제 1%가 되어 전원이 나가도 이상하지 않다. 내 핸드폰 밧데리는 이미 절약모드이다. 친구에게 답장을 하고 데리러 오라는 둥 메시지를 하는 밧데리도 아깝다. 당장 구글맵으로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한다. 친구가 데려다주고 표도 대신 끊어줬었기에 나는 여기가 어디인지, 실질적으로 얼마나 떨어진 곳인지 알지 못했다.


다행히 구글맵을 확인하는 동안 밧데리는 살아있었다. 밖으로 나와 방향을 잡았고 눈이 펑펑 쏟아지는 속에서 아니야 눈이 이렇게 올 때는 강도들도 쉴거야 라고 최면을 걸면서 그저 걸었다. 눈속에서도 구걸을 하는 사람들을 보며 마음이 아팠지만 그럴때가 아니다 멈춰서다 내 아이폰을 누가 채갈지 모른다. 다가 오는 행인들도 모두가 수상하다. 가까이서 보니 10대 소녀 둘이었다. 10대 소녀에게서도 위협감을 느끼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발걸음은 속도를 줄이지 않는다.


가장 큰 관문인 어두운 굴다리를 앞두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무섭지만 쫄아있는 나를 들켜서는 안되니 굳이 가까이 가서 신호를 기다린다. 고맙게도 무단횡단을 해서 먼저 사라져준다.


집에 거의 도착했다. 친구의 집에는 전자키가 없으면 로비에 들어갈 수 없다. 내가 끝났다고 말을 했지만 친구는 밑에서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나에게 이 근처의 치안이 안좋다는 것을 계속 불평하면서 조심하라고 누누히 강조하더니 큰 눈에 이 고생을 하고 집에 오는데 걱정도 되지 않나보다. 키를 열고 들어가는 사람의 뒤에 따라 들어갔다. 친구가 그제서야 나와서 어떻게 들어왔냐며 말을 거는데 한대 쥐어 패고 싶은 마음이 든다.


집에 도착해서 보니 핸드폰의 밧데리는 아직 5% 그대로이다. 애플사에 전화에서 한바탕 불만을 토로하고 사과를 받고싶은 기분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대신 친구에게 한바탕 불만을 쏟아내고, 인간에 대한 기대를 또 한층 내려놓고, 아 진짜 이게 사람이라는 건데 인간이랑 결혼은 못하겠다, 인간이란게 이 따위인데 결혼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다 같은 부정적이고 확정적인 짜증이 밀려온다.


눈에 젖은 옷을 정리하면서 문득 내가 왜 행복하지 않은지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나에게는 너무 많은 내가 있다. 행복하고 안정적이고 희망에 찬 내가 계획을 세우고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눈내리는 위험한 거리에 핸드폰 밧데리도 없이 홀로 남겨진 상황의 나같은, 존재하는 지도 알지 못했던 나를 만나게 되고, 그런 새로운 나들은 대체로 행복한 내가 살고 있는 삶에서 행복하지 않다.


그 나들은 대체로 후회를 한다. 그 때 그 대기업을 그만두지 않고 연금을 확보했었어야 한다, 그 때 그냥 몇년 더 회사에 다니면서 그 집을 샀었어야 한다, 며 불과 몇 초에 지나지 않는 시간이지만, 확실하게 불행하고, 지금의 나에 대한 큰 의구심을 가져오며, 한번 존재하기 시작한 의구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행복한 나로 돌아가도 다른 내가 되면 행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하게 행복하지 않은 내가 존재하고 언제 다시 나를 찾아올 지 모르며 나라는 총합은 행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라는 의구심생긴다. 그리고 나는 의구심이 존재하는, 그러나 지금 당장은 행복하다고 주장하고 싶은 내가 된다.


행복했다. 의구심이 생기고, 행복하지 않다. 행복하지 않은 나는 여러가지 상황과 버전이 있어서 나의 의구심들 또한 다양하고 여러가지 버전으로 나를 불행하게 한다.


이제는 행복하겠다는 목표는 버려야겠다. 공식적으로 나에게 나들에게 선언하자. 퍼니는 이제 행복하지 않겠습니다. 안 행복하지 않은 정도를 목표로 하겠습니다. 아니다 이건 또 좀 아닌 것 같다. 목표는 행복으로 하되, 행복을 선호하되, 안 행복하지 않은 것에 만족하겠습니다. 그래 이게 좀 더 맞는 것 같다. 계속 행복할 수 없다면 목표로도 못한다면 너무 아쉽다.


그럴 수 있지. 안 행복할 수 있다. 행복하다가도 안 행복할 수도, 오늘의 행복이 내일부터는 아니게 될 수도 있다. 그럴 수 있다.


행복은 변하지 않는 상태, 끊임없이 충족되는 마음의 어떤 경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고통이 없고 아프지 않아 0보다 더 위의 행복한 생산적인 삶을 살게 된다면 삶에서 불행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것 같다. 그럴 수 밖에. 살아보지 않았으니 몰랐을 수 있다.


0보다 위에 차원에서도 마이너스의 불행은 존재한다. 마이너스의 고통에 있어서가 아니라, 원래의 상태에서 내려가는 상황에서는 잃어버린 아픔에 절대적으로 마이너스가 아니어도 절대적인 마이너스 같은 상황으로 느껴지고, 실제도 몇초 정도는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이제 알았으니, 다음에는 좀 덜 불행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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