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게 있기는 한걸까
2008년 일본에 처음 갔을 때, 마냥 좋기만 했다. 지긋지긋한 환경에서 벗어나 자유와 끊임없이 펼쳐진 찬란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구질구질한 한국이 아니라 선진국에 가면 모두가 관대하고 철학을 대화하고 잘 이끌어 줄 것만 같았다. 그 꿈이 깨진 것은 입학하자 마자 바로, 였다.
그에 반해 미국에 대한 기대와 좋은 감정은 처음부터 와장창 깨진 채 온 것이 맞다. 오히려 총기사고와 살인적인 의료보험에 대한 공포감을 안고 온 것이 더 맞는 표현이겠다. 대도시에서 오래 살아봤고, 좋은 아파트에서도 살아봤고, 좋은 음식도 좋은 곳도 가봤고 더이상 환상도 기대도 없는데 불안함과 공포만 있는데 비데도 없는 낡은 아파트에서 대마초냄새가 진동하니 처음에 미국은 일본과 달리 마이너스로 시작한 듯하다.
첫인상은 아무것도 없는 풀밭이었지만 그 넓은 공간에서 개산책을 하고 여러가지 활동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면서, 친절하고 수다스러운 미국인들과 인간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조금씩 긍정적인 모습이 보였다. 슈퍼에서 맛있는 음식을 찾고 싸고 좋은 식재료를 탐방하면서 한국과는 다르지만 이 곳에서의 즐거움을 하나 둘 알아가면서 역시 이곳도 사람사는 곳이고 다 그곳만의 즐거움과 즐길거리가 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강변가 모래사장을 매일 걸으며 드넓다 못해 한바퀴를 도는데 수킬로미터가 넘는 공원을 걸으며 이런 커다란 공간을 무료로 매일 즐길 수 있다면 좁은 땅에서 복작복작하게 사는 것과는 다른 호방한 마음으로 살 수 있겠다 하는 생각도 자주 들었다.
항상 마주하는 얼굴들은 대부분 흑인들이었는데 살면서 미국은 흑인들이 더 많이 사는 곳이라고 생각을 해본적이 없어서 인지 어색했지만 매일보다 보니 익숙해져 이 도시는 또 그런 곳인가보다 라고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좀 잘못된 정보였다. 외교부의 정보에 따른 것이니 아마도 정확하다고 생각되는 이 도시에서의 흑인비율은 겨우 13%남짓, 백인이 60%가 넘는다. 대학가라서 자주 보이는 황인종의 비율도 사실은 5% 정도이다. 내가 주변에서 보는 것은 대학가와 대학가 근처의 우범지대인 이곳의 인구구성이 흑인들과 학생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였다. 도심에 가면 보이는 백인들이나 다른 인종들은 관광객인가 했지만, 어쩌면 그것이 오해로, 그 사람들이 주민이고, 나같은 황인종 학생들이 이방인이다.
대학교의 이벤트로 5성급 호텔의 에프터눈티를 저렴한 가격으로 참가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는 가자고 해도 이미 가본적이 여러번이라 궁금하지 않아 가지 않을 그런 이벤트였지만 미국에서 참가할 수 있다니 흥미가 생겨 참가를 했다. 평상시라면 오지 않는 고급호텔에서 오랜만에 익숙한 ‘서비스’를 받으니 기분이 묘했다. 늘 부자 인생을 살아 왔다기 보다는, 한국에서는 평상시에 미국의 고급호텔에서나 받을 수 있는 서비스를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고급 서비스 문화를 한국과 일본이 따라한 것 이었을 텐데, 오히려 더 고급서비스가 보편화 되었다는게 아이러니 같기도 하고 미국의 서비스가 더 고급져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재미있었다.
애프터눈티는 대학의 이벤트이니 한곳의 장소에서 학생들을 모아놓고 이루어 졌다. 호텔은 넓었고, 다른 곳에서는 일반적인 고객들이 모든 좌석에 꽉차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재미있었던 것은, 모든 종업원이 백인이었다는 것이고, 한 팀을 제외한 모든 고객들이 백인, 혹인 그룹의 1-2명 만 인도인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미국에 와서 종업원이 전부 백인인 경우를 본적이 없다. 정확한 데이터와 근거를 가지고 계산을 해본 것이 아니고 모든 곳을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짧은 나의 경험에 의한 또다른 편견일 가능성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 날의 그 풍경은 너무나도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다른 인종들이 모두 모여서 여러가지 느낌과 생경한 느낌을 주는 지금까지의 미국 풍경이 아니라, 백인 종업원들이 백인들 특유의 크고 거만해 보이는 (동양문화권인 나의 입장에서는 깊게 앉아서 가슴을 딱피고 고개를 뻣뻣이 들면서 다리를 한쪽 무릎에 올리는 등 몸을 크게 하는 동작이 거만해 보인다. 그들이 그런 의도가 아니라도) 동작으로 앉아있거나 서있는 모습이 밖의 세상과는 단절된 다른, 뭔가 옛날 타임머신을 타고 20년 정도는 돌아온 듯한 묘한 감정이 일게했다.
한 팀 있던 흑인들은 루이비통 백을 들고 있었다.
글쎄, 단 한번 잠깐 스치듯 본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이게 미국의 인종차별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흑인으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백인들만이 종업원으로 있고 고객들은 모두 거만한 큰 동작으로 나는 엄청난 여유있는 사람이야, 라는 몸동작을 하고 있을때, 내가 흑인의 바이브와 말투를 쓰게 되면 왠지 모르게 무시당할 것 같다는 느낌, 혹은 확신이 피부를 타고 흐를 때, 너와 나는 달라, 여기는 너의 문화와 너를 존중하지 않아, 여기에서 너는 우리의 규칙을 따라야 하고, 그래봤자 너는 여기의 일원이 될 수 없어, 라는 느낌을 받지 않았을까?
예전에는 이런 호텔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하나의 스테이터스라고 생각, 착각하던 시절도 있었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돈을 버는 것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던 것 같다. 유럽에서 호텔에 묵을 때는 분위기에 취해 신나 있어서 주변의 고객들에게 관심도 없었고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러나 처음 온 미국의 호텔에서는 주변이 보였고, 이 도시에서 시간을 벌써 3주째 보내고 있는 만큼 관광객으로 있었을 때와는 다른 시선을 갖고 종업원이, 서비스가, 미국의 한 도시에서의 공간의 분리가 보였다.
내가 있는 아파트에는 흑인들이 정말 많다. 백인들이 오히려 10%대일 것 같다. 그나마도 학생들로 보이고 앳된 얼굴이다. 온몸에 타투를 하고 흑인 랩퍼의 뮤직비디오에 나올 것같은 형님들 3명이 내가 혼자 타고 있는 엘레베이터에 탄 적이 있다. 이미 많은 경우에 흑인들과 엘레베이터를 탔기 때문에 딱히 무섭지는 않았다. 그래도 원래 겁이 많고 일본식 몸짓이 남아있기 때문에 내가 무서워 한다고 보여졌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그중 한 형님이 내가 무서워한다고 생각했는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자기들 착한 사람들이라고 농담을 했다. 다른 두명은 이친구 갑자기 뭐임? 하는 반응이었지만 고마웠고, 안심되었고, 미안했고, 짠했다. 흑인들도 자신들의 빡센 외형이 다른 인종들 특히 동양인들에게 무서움을 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에 대해 먼저 공격적이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상당히 친절하고 피곤한 행위 일 것이다. 그런 행동을 기꺼이 해준 그 흑인 형님과의 시간이, 5성급 호텔에서 이질적인 기분이 드는 것보다 더 마음에 든다.
메인 문화일 호텔 문화보다 마이너한 문화에서 인간미와 친근함을 느끼는 나의 반골기질이 아직도 남아있구나, 알아차리는 경험이었다. 흑인들의 설명할 수 없고 증명할 수 없는 서운함을 느낄 수 있는 경험이었다. 호텔에 가는 사람들을 비난 하고 싶은 마음보다는 다양성을 강제로라도 가지고 있어야하는 사회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