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퇴사합니다, 그후
퇴사한다고 말을 하는 걸 결정을 해놓고도 나의 마음에 있던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무서웠다. 나의 MBTI가 INFP라서, 걱정이 많은 성격이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인생이 회사를 때려치고 나면 노답이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부하가 그만 둔다는게 그다지 아름다운 일을 아니니까, 상사가 어떤 반응을 할지 모르겠는 것도, 이제는 나에게 든든한 방어막이었던 상장기업, 일본인이 결혼하고 싶은 탑10에 드는 안정적인 기업 사원이 아닌 그냥 생 나로 돌아가야 하는 것, 실업자가 되는 것, 막연한 해보지 않은 회사를 그만둔다는 행위에 대한 두려움이 겹쳐져, 계속 무서운 감정이 드는 것을 컨트롤할 수가 없었고, 그런 불안은 실제적인 신체 문제로도 이어져, 두통 이라던가, 배탈 이라던가, 심장이 쿵쿵쿵 울려 기절할 것 같다던가, 그런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나, 개인의 안에서는 지옥 같은 시간들이 있었다.
나 혼자였다면 무서움에 지고, 말을 못했을 것 같다. 내가 4월5일월요일에 실장님, 저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라고 말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룹 코칭의 멤버들 덕분이다. 작년부터 시작해 1년 이상 계속해온 그룹 코칭은 3개월에 한번씩 그룹멤버가 바뀌지만, 시스템(이 멋진 그룹코칭 시스템은 다음에 더 자세히 말하기로 하자)은 일정하여, 나의 목표를 위해 하는 행위를 말하고, 그에 대한 피드백을 받는다. 나의 인생에 대한 태도와 그에 따른 목표는 매주 변하지만 당분간 회사를 때려쳐야 되는데 잘 되지 않는 다는 내용이4개월 정도 지속되었고, 모든 노력이 실패하고 있었다. 이제는 그냥 그만두는 수밖에 남지 않게 되는 포인트가 왔고, 그룹멤버들에게 말을 하다보니 내가 알게 되었다. 아 이제는 더 이상 노력할 포인트가 나의 인생에는 없구나, 이제는 그냥 그만두는 것 밖에는 할 수 없다. 그럼 그만둔다고 이야기하자, 라는 생각이 말하면서 들었고, 그룹멤버들에게 선언을 해버렸다. 사정상 금요일날 이야기 하려 했는데, 실장님 휴가고 그래서 못했지만, 월요일날 그만 둔다고 말 하겠습니다.
말이라는 건 뭔가 저주 같은 힘이 있다. 주말내내 월요일날 그만둔다고 말하겠습니다. 라고 한 선언은 머리에 윙윙 머물렀고, 월요일날 오전까지는 그냥 보낼 수있었지만, 월요일날 말을 해야하니, 서둘러 실장님에게 시간을 정해 그만둔다는 말을 할 회의시간을 예약했고, 그 순간이 왔을 때는, 정말로 말을 해버렸다.
현실은 늘 나의 상상보다도 별 것 없다. 실장님은 젠틀 하셨고, 나의 미래를 걱정 해주시며 좋은 반응을 보여주셨고, 그날의 근무도 그냥 그렇게 끝이 났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나의 마음에도 변화가 없었다. 딱히 느껴지는 감정도, 생각도 없었다. 픽사의 영화 소울에서 주인공이 꿈을 이룬 후의 마음처럼, 그냥 별생각이 들지 않았다. 텔레워크 중이라 그냥 컴퓨터를 끈 것뿐이지만, 퇴근 후 밖을 내려다보는데 반짝반짝 한거다. 안경을 초음파 기계에 넣고 닦으면 믿을 수 없이 세상이 밝아지는 경험을 한 안경잡이 들이 있다면, 그런 기분이었다. (우리집에 초음파 클리너는 있지만 그날은 사용하지 않았다.) 마치 안경에 있던 오염이 필터처럼 나의 시야를 가리고 있었는데 없어진 것처럼, 눈 앞에 있는 풍경은 늘 눈앞에 있는 배경이었는데, 눈에 필터가 없어진 것처럼 클리어하게, 빛이 나며, 밝았다. 그냥 보는 행위만으로도 행복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런 기분도 들지는 않았지만, 눈의 필터는 벗겨진, 그런 하루였다.
4월5일 그만 둔다는 나의 인생에서는 역사적인 선언을 하고, 눈에 필터도 없어진 듯한 행복한 마음이 되어, 행복이 마음 가득히 하루하루를 보냈다. 이때 굉장히 재밌는 현상이 있었다. 80년 후반에 태어난 사람들은 (혹은 지금 세대도) 공감해줄지 모르겠지만, 나는 책을 읽는 것은 좋은 것, 해야 하는 것, 칭찬받는 것, 읽어야만 하는 그런 이상한 의무감을 갖고 있었다. 가끔 책을 읽는 것이 즐거운 시기도 있었지만, 2020년 등, 전혀 책을 읽을 수 없는 시기도 있었다. 책을 읽지 못하는 시기에는 기분이 별로다. 자기에 대한 자신감도 왠지 모르게 떨어지지만 그럴수록 책은 더 읽기 싫다. 그랬던 내가 갑자기 3월말에 전자책 서비스에 가입을 했다. 5권정도면 한달에 충분히 많다, 이렇게 생각하고 5권을 계약했다. 계약하고 지금 28일째인데, 1권 읽는 중이고, 3권을 읽었다. 부족하다고 느껴져서 또 계약한 다른 어플에서 1권을 읽는 중이고, 3권을 읽다 말았으며, 14권의 책을 읽었다. 평생 안 읽던 소설도 읽었다. 그 때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전에는 그렇게 그만 두려고 해도 그만 둘 수 없었고, 행복하려고 해도 행복한 마음이 들지 않았고, 책을 읽으려 해도 한페이지 읽는 것만으로도 고역이었는데, 이제는 회사도 그만둘 수 있었고, 매일이 행복한 마음이며, 책은 술술 읽혀 노력한 것도 아닌데 짬짬이 읽은 양이 이틀에 1권 이상이 된다. 뭔가 순서가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책을 읽어서 행복을 이루고자 한 과거의 나는 그 길에 닿지 못했고, 행복해졌더니, 그냥 책이 읽혔다. 마치 숨을 쉬듯 길을 걷듯 자연스럽게.
이런 마음을 회사에 다니면서 가질 수 있었다면, 그러면 조금 덜 불행 했을까? 나는 자연스러워졌고, 회사는 그만뒀고, 책을 즐겁게 읽게 되었고,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