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 파커 볼펜
내가 중학교 1학년 기말고사를 마친 12월 어느 날, 우리 가족은 십수 년간 살던 영등포구 대림동을 떠나 강동구 성내동의 오래된 2층 양옥집의 1층 한 켠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드디어 방이 두 개인 집에서 살게 된 것에 나와 나보다 두 살 어린 내 동생은 겉으로 크게 표현하지 않았지만 적잖이 기뻐했다. 이걸 보면 금세 알 수 있듯, 그전까지 우리 가족은 대림동 어느 목욕탕 건물 2층 다세대 ‘단칸방’에서 살아왔던 것이다. 1980년대를 관통했던 그 시대를 지금의 관점에서 아무리 보정을 한다고 하더라도 무척이나 가난한 집 맞다.
"이제 우리도 방이 두 개라니, 너무 좋은데?"
나와 동생은 이 방 두 개를 건너 다니며 - 그렇다, 이 방을 기억 자로 이어주는 부엌 (‘주방’이라고 말하기 싫다) 겸 씻는 곳 (‘욕실’이라고 말 못하겠다)이 있었다 - 장난치며 뛰어다녔던 기억이 난다. 화장실은 집 밖 마당 한 구석에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겨울에 몹시 추웠고, 여름에는 구슬 같은 땀을 흘리곤 했다, 그것뿐이다.
책상 위에 책꽂이가 얹혀 있고, 책꽂이 아래쪽에는 책상을 환히 밝히는 형광등이 붙어 있는 아주 그럴듯한 책상 말이다. 그전까지는 내 어깨너비만 한 폭의 앵글로 만든 책꽂이 겸 좌식 책상이 내 유일한 공부 공간이었는데, 이젠 어엿한 중학교 2학년 생의 사회적 지위에 어울릴만한 책상이 새로 생긴 것이다. 이건 아버지의 막내 동생인 막내 고모의 이사 선물이었다. 난 지금도 가끔 이 책상을 떠올리고, 막내 고모 생각을 한다.
‘PARKER’라는 로고가 인쇄된 작고 길쭉한 상자를 열었더니, 안에 금속성의 볼펜과 샤프가 하나씩 누워 있었다. 중학교 1학년때까지만 하더라도 난 볼펜을 거의 쓰지 않았지만, 이때부터는 연습장에 빽빽이 숙제를 할 때도 볼펜을 쓰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뭔가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도 들고 동네 문구점에서 파는 여느 싸구려 필기구와는 사뭇 다른 자태에 공부할 의욕이 넘쳐나게 되었다.
난 본래 물건을 잘 잃어버린다. 지갑이든 핸드폰이든 사소하게 저지른 분실의 역사는 길고 다채롭다. 그래서인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기 전에는 내가 있던 자리를 섬세하리만치 조심스럽게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다. 결국 마흔 살의 나이가 끝나가는 지금에 와서는 물건을 잘 잃어버리지 않게 되었다. 노력으로 단점을 극복한 좋은 사례가 되고 말았다.
아직도 쓰고 있다.
무려 35년을 나와 함께 하고 있으니 이 선물을 내게 준 미국 고모도 매우 흡족해하실 것이다. 아마 이걸 준 사실조차 잊으셨을 수도 있겠지만, 그 이후 몇 년에 한 번 만날 때마다 그 한 번도 파커 필기구 얘기를 꺼낸 적은 없다. ‘이번에 만나 뵈면 얘기해야지’하면서도 그때마다 잊는다.
생각해 보니, 난 이 펜으로 내 인생의 기회와 고비를 넘겨왔다. 중학교 2학년 이후 치른 모든 시험 (연합고사, 외고 시험, 수능시험, 대학별 본고사, 몇 가지 자격증 시험이나 어느 회사의 입사를 위한 필기시험) 그리고 지금까지 회사에서 업무를 보면서 적은 메모들... 내 삶의 여정에서 누군가로부터 내 실력을 검증받을 때나 내 기억을 보조하는 모든 순간에 항상 함께 해 온 필기구였다.
난 내 가난했던 어린 시절, 내 친척들이 나에게 내어준 배려와 관심, 그리고 선물들 덕분에 지금 이렇게나마 무탈하게 살고 있다고 믿는다. 비록 무탈하다는 것이 무엇 하나 내세울 것 없이, 그냥 너무도 평범하게 살고 있어서, 무척이나 잘 될 줄 알았던 그들의 기대에는 크게 못 미치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그분들의 배려와 선물들이 꼭 내가 뭔가 잘 되길 바라고 해 주신 건 아닐 것이다. 피붙이 간의 애정이라는 건 대가를 바라고 하는 것은 아니므로.
내가 받아온 그 좋은 것들을 수십 배, 수백 배로 크게 키워서 보답하고 싶었지만 여전히 허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은 것 하나하나가 내게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누군가의 작은 배려가 한 사람의 인생에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전하고 싶다. 막내 고모의 책상, 미국 고모의 파커 펜, 그 외에도 나에게 물심양면 도움을 주고 응원해 마지않았던 아버지의 남매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이들을 통해 난 내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깨닫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시간을 건너온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물건들이 있을 겁니다. 그 물건들은 결국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고, 그 당시의 나를 바라보게 해주는 매개체가 되어주곤 하죠. 앞으로 생각날 때마다 제 기억과 감정을 과거로 데려다주는 물건들에 대해 써보려 합니다. 현재의 나를 만든 물건들에 대한 이야기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