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편: CD 플레이어
난 2002년 1월 2일부터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군 복무를 1998년 3월에 마쳤는데, 졸업을 2002년 2월에 했으니 무려 2개 학년을 4년 동안 다닌 셈이다. 이러니 취업도 동기들보다 1년 이상 늦었고, 첫 직장 공채 입사 동기 중에 같은 대학 한 학번 후배도 있었다.
취업을 하자마자 든 생각은 이렇다. ‘이제 돈 걱정은 조금 덜 해도 되겠구나’.
사실 빨리 돈을 벌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에 좀 더 많은 회사에 지원도 하고 그랬어야 하는데, 그냥 합격한 회사 - 많지 않았다 - 중에서 적당한 회사에 입사하기로 마음먹었다. 기다려봐야 별 큰 차이가 없을 것이라는, 지금 생각에는 참으로 안일한 태도였지만.
입사가 결정되자 나는 양복도 사고 컴퓨터도 새로 장만하고, 뭔가 이상한 기운에 이끌려 미국 RCA라는 브랜드의 카세트테이프와 CD가 돌아가는, 그리고 라디오까지 되는 플레이어를 하나 샀다.
요즘 세상이야 CD도 잘 안 듣는 판에 카세트테이프가 돌아가는 기기는 더더욱 찾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요즘에도 몇몇 브랜드에서는 판매를 이어가고 있다. 마치 인간문화재의 명맥을 잇는 뉴스를 보는 듯 하지만, 실제로 있더라. 이걸 팔고 있는 브랜드들조차 지금은 ‘한물 간’ 곳들이라, 더욱 그런 느낌이 든다.
부모님 집에는 아직 그때 내가 산 RCA 플레이어가 있고, CD 뚜껑을 열어보니 어르신들이 들을 법한 ‘트로트 메들리’가 꽂혀 있었다. 아마도 최근에도 부모님 중 누군가가 사용하고 있는 모양이다. 20년이 훌쩍 넘은 노령의 기기를 인생 황혼기의 부모님이 쓰고 있는 상황이 흥미롭다.
내가 직장 생활을 시작한 2002년 당시에는 mp3 파일이 서서히 대중화를 시작한 때였지만, 저작권 따위는 사람들의 관심 밖이라, 이른바 ‘믹스 CD’라는 게 존재했었다. 말하자면 인터넷에서 무단으로 돌아다니는 최신곡 파일들을 모아서 자신만의 CD를 굽는 방식 말이다.
그 해 겨울, 내 생일 즈음이었는데, 같은 팀의 후배 (후배이긴 하지만 같은 학교 같은 학번이었다, 다만 공채 기수만 내가 한 기수 빠를 뿐)가 이 믹스 CD 하나를 선물해 주었다. 남자들끼리 넘사스럽게도 생일 선물을 믹스 CD로 하다니, 지금도 웃음이 나지만, 고맙기는 했다. 주로 가수 박ㅇㅇ 의 노래들이 많았는데 가요를 잘 듣지 않았던 나로서는, 받을 당시만 해도 큰 관심을 두진 않았다.
하지만 퇴근하고 나서 밤에 이 믹스 CD를 듣고 있자니 꽤나 좋은 노래들이 많아서 그 후배에게 몇 달 후에 다시금 고맙다고 말했다. 재미있는 건 그걸 선물한 본인도 그 가수 노래는 그렇게 많이 듣진 않는다고 고백한 것이다. 그 후배는 이처럼 덧붙였다.
“그냥 사람들이 많이 듣는 것 같아서 다운받았어요.”
그래, 뭐 괜찮아. 난 지금도 그 가수의 노래를 듣고 있으니, 그 후배가 내게 좋은 기회를 준 셈이니까.
그 후배는 얼마 안 있어, 회사 체육대회 때 큰 부상을 입고, 회사의 처우나 몇몇 임원들의 태도에 큰 실망을 하고 회사를 떠났다. 그 이후 그는 지금까지 어느 공기업에서 해외 주재원을 하면서 잘 살고 있다. 물론 여전히 그와 연락하고 지낸다. 서로 존댓말을 하면서 말이다.
그 박ㅇㅇ라는 가수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난 그 후배가 떠오른다. 생긴 건 참으로 남자답고 서글서글하지만, 성격은 매우 섬세했고 일도 잘하는 그런 친구로 말이다.
이 RCA CD 플레이어도 결국엔 내가 관계를 맺은 사람들과 그 사람들과 만든 기억을 소환해 주는 마중물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내가 번 돈으로 산 첫 번째 전자제품이자 당시 여자친구에게 선물할 믹스 CD를 테스트하던 그날 밤의 기억까지 일깨워 주는 기기라서 더욱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