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막무침 Jul 16. 2021

#9. 실외기 인간

#9. 실외기 인간


몰디브에서 에어컨을 틀면 북극에서는 실외기가 돌아간다. 무한도전 228회 지구온난화 특집.


초여름의 초가 초보 할 때 初인지, 초월할 때 超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더운 ‘초’ 여름의 어느 날. 성현은 에어컨의 존재에 대해 세삼스러운 감사를 느끼며 리모컨 전원 버튼을 눌렸다. 필터 청소를 하지 않아서 풍기는 시큼한 바람이 코끝을 살짝 스쳤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평소 후각이 예민하지 않았던 성현은 몇 번 킁킁대더니 금세 평소 상태로 돌아갔다.


본격적으로 에어컨 아래 요를 깔고 누운 성현은 3년 차 주부이자, 6년 차 장수생이다. 인터넷 강의를 보라고 아내가 사준 태블릿은 아내가 출근하고 나면 언제나 그의 장난감으로 변모했다. 유튜브, 넷플릭스, 트위치 등등에서 제공해 주는 영상들은 지루한 강의 영상보다 그의 시선과 시간을 잡아끌었고, 모르긴 몰라도 그의 장수 생활에 꽤나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 아래 담요를 덮고 태블릿으로 영상을 보는 완벽한 환경 속에서 오후 내내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어느새 아내가 퇴근하여 집에 돌아왔다. 도어록의 비밀번호가 눌려지는 소리가 들리자, 부모님이 갑자기 방문을 열어젖힌 청소년의 그것처럼 후다닥 자리를 정리한 성현은 어색한 미소로 아내를 맞이했다.


들어오자마자 신경질적으로 신발을 벗어재낀 아내는 아무래도 부장에게 한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고생 많았다는 성현의 말을 뒤로한 채 거실로 들어온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킁킁대더니 켜져 있는 에어컨을 발견하고 그에게 말했다. "에어컨 켰네. 필터 청소 안 했지? 나 냄새에 예민한 거 알면서 왜 그래. 내가 틀지 말라는 게 아니잖아.적어도 필터 청소는 하고 틀었어야지. 내가 오빠한테 전기세를 내라고 한 것도 아니고 하루 종일 집에 있으면서,에어컨을 키려면 청소라도 하고 켜라는 게 그렇게 어려운 부탁이야? 기본적인 거잖아. 안 그래도 짜증 나는데 오빠까지 왜 이래." 한바탕 말을 쏟아낸 그녀는 씩씩대며 베란다 문을 열어젖혔다.


성현은 집에 오자마자 불같이 화를 내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고 되레 화도 났지만 길어지는 공시 생활에 요즘 들어 부쩍 눈치가 보이는 상황인지라 저자세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미안해. 날씨도 많이 덥고 자기 회사에서 고생하고 오는데 집 들어왔을 때 좀 시원했으면 좋을 것 같아서 잠시 틀어놨는데 필터 청소까지는 할 시간이 없었어. 환기라도 할 걸 그랬다. 자기는 땀에 젖은 모습도 왜 이렇게 예뻐? 예쁜 자기 오늘도 고생 많았으니까 소파에 누워봐. 내가 안마해 줄게. 냄새나는 산소도 내가 후딱 마셔서 없애줄게."


성현의 해맑아 보이는표정과 말투, 그리고 자신을 생각해서 에어컨을 켰는데 필터 청소를 잊었다는 알랑방귀에 어느 정도 화가 풀렸는지 그녀는 소파에 엎드리며 말했다. "말이라도 못 하면 몰라. 얼마나 시원하게 하는지 보고 생각해 볼게." 소파에엎드린 아내의 뒤에서 보이지 않게 얼굴을 찌푸린 성현은 그녀의 어깻죽지를 힘껏 주무르면서 물었다. "오늘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어?" 속에서 끓는 화를 손끝에 집중시켜 강하게 주물렀더니 오히려 그녀는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 "아 시원하다. 시원해. 아니 뭐 평소랑 똑같지. 그 부장 있잖아. 진짜 대체 왜 그러는지 몰라. 화나는 일 있으면다 나한테 푸는 것 같아." 성현은 회사에서 받은 화를 왜 자기한테 푸는지 이해가 안 됐지만 공감해 주는 척이라도해야 할 것 같아 대답했다. "아니 진짜 왜 그런대. 자기처럼 일도 잘하고 완벽한 인재가 어디 있다고." 아내는 성현의 안마와 공감에 화가 어느 정도 누그러진 듯 말했다. "그러니까 말이야...아 시원해"


그렇게 안마를 한지 몇 분, 아내는 씻으러 욕실로 들어가고 성현은 그녀가 좋아하는 꽃게탕을 준비했다. 이내 자리에 앉은 둘은 반주를 한잔하면서 그녀의 회사 뒷담을 시작했다. 한참 이야기를 한 뒤 아내는 이제 만족스럽다는 듯말했다. ‘하... 안마도 시원하고, 꽃게탕 국물도 시원하고, 자기가 틀어놓은 에어컨도 시원하고... 필터는 안 닦았지만? 거기다 부장 욕하니까 속이 다 시원하고. 시원한 일 투성이네.’ 그녀의 말에 성현은 입꼬리를 올리며 다행이라 대답했지만 아까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말투에 가슴속 깊은 곳에서는 화가 사그라들지 않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뒤 아내는 먼저 자러 침실로 들어갔고 성현은 뒷정리를 하고 그녀의 옆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아내보다 성현이 조금 더 더웠던 열대야의 밤은 그렇게 지나갔다.


다음날 아침. 아내가 출근한 뒤 어김없이 태블릿을 만지작대던 성현은 문득 어제 일이 생각나 에어컨 필터를 닦기 시작했다. 안쪽 깊숙이 닦을 수 있었겠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보이는 부분만 깨끗하게 닦아내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에어컨을 켰더니 당연하게도 어제와 같은 시큼한 바람이 살랑 불었다. 어제와 다른 부분이라면 아무리 온도를 낮춰도 시원한 바람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에어컨을 이리저리 만져보던 그는태블릿으로 에어컨 수리를 검색하여 업체에 전화를 걸었고, 오후에 방문하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몇 시간 뒤, 통화로 이야기했던 방문 시간보다도 30분 정도 늦게 에어컨 기사가 초인종을 눌렀다. 앞집에서 조금오래 걸려서 늦었다고 사과하는 기사의 말은 이미 한껏 짜증이 난 성현에게 들리지 않았다. 오전 공부를 에어컨 고장으로 날렸고, 거기다 30분이나 추가로 자신의 공부를 이 사람이 방해했다는 생각에 성현은 속에서 뜨끈한 것이끓어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사과하며 집으로 들어오는 에어컨 기사에게 성현은 말했다. "아니. 됐고. 에어컨이나 빨리 봐줘요." 에어컨 기사는성현의 기분과 표정에 아무 관심이 없다는 듯 소파에 발을 딛고 올라서서 에어컨을 이리저리 훑어보더니 말했다. "실외기는 베란다에 있나요?" 그런 상식적인 걸 왜 물어보는지 성현은 이해가 안 됐지만 자신이 지금 불편하다는 티를 최대한 내며 대답했다. "당연히 베란다에 있겠죠." 에어컨 기사는 떨떠름한 표정이었지만 알겠다고 대답과 함께 베란다로 나가 실외기를 만져보더니 말했다. "에어컨 한 번만 켜봐주시겠어요?" 성현은 에어컨을 다시 켰지만 여전히 미지근한 바람이 나왔다. "아직도 바람이 이 모양인데요?" 에어컨 기사는 매운 것을 먹은 사람처럼 쓰읍하고 잠시 생각을 하더니 거실로 들어오며 성현에게 말했다. "이게 실외기에 문제가 있네요. 찬바람이 나오려면 실외기에서 더운 바람을 빼줘야 하는데 지금 실외기에 뭐가 하나 마모가 된 것 같아요. 부품이 저희 매장에 있는지를 몰라서 확인해보고 내일 중에 다시 방문을 해야 할 것 같은데..."


거실로 나오던 에어컨 기사의 팔에 찬장에 올려져 있던 성현의 태블릿이 부딪혀 바닥으로 떨어졌다. ‘콰직’ 하고 떨어지는 불안한 소리에 허겁지겁 태블릿을 확인해보니 액정이 산산조각 나있었다. 당황한 에어컨 기사는 "아이고 이를 어째.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거 액정 수리비는 제가 보상해드리겠습니다."라며 연신 사과를 했지만 성현은 이미 핀트가 나간듯한 표정으로 쌓여있던 화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아니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수리비 준다고 하면 다입니까? 애초에 30분이나 늦게 오고, 태블릿이나 부수고 앉았고, 거기다 뭐요? 부품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니까 내일까지 기다리라고요? 지금 장난하자는 겁니까? 아까 통화하셨던 분이죠? 아까 통화할 때 상황 설명 다했는데 그럼 애초에 오실 때 준비를 하고 와야죠. 뭔 일을 이딴 식으로 합니까? 거기다 수리비만 보상해 주면 다입니까? 그동안 저거 못쓰면 그동안 제가 얼마나 손해 보는지 아시기는 합니까? 서비스가 뭐 이따위에요?" 성현이 한바탕 화를 쏟아내는 중에도 에어컨 기사는 연신 죄송하다고 허리를 굽히며 사과를 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태블릿 수리비는 제가 꼭 보상해드리겠

습니다. 이거 에어컨도 지금 매장 다녀와서 오늘 내로 꼭 고쳐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에어컨 기사는 연신 죄송하다고 하며 부품을 가지러 매장으로 떠났고, 성현은 이 찝찝한 공기 속에서 더 기다려야한다는 것과 태블릿 수리비에 공부 방해 시간까지 합쳐서 청구를 해야 하나 등의 생각 때문에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윽고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온 에어컨 기사는 실외기를 고치기 시작했고 몇 분 뒤 성현에게 말했다. "에어컨 한 번 켜보시겠어요?" 에어컨을 키자 아까보다 훨씬 시원한 바람이 나왔다. 확실히 실외기에 문제가 있었던게 맞는 것 같았다. 잠시 시원한 바람을 맞고 있던 성현은 끓어올랐던 기분이 진정되는 것을 느끼며, 땀을 흘리며 거실로 들어온 기사에게 한층 누그러진 말투로 말했다


"아까는 화를 내서 죄송합니다. 그래도 생각해 주셔야 하는게 한참 기다리기도 했고, 태블릿도 그렇고 부품을 애초에 안 가져오셔서 더 기다려야 한다니까 저도 모르게 화를냈네요. 태블릿은 제가 나중에 as 맡겨보고 영수증 찍어서 보내드릴게요. 땀이 많이 나시는데 에어컨 바람 좀 쐬다가 들어가세요." 에어컨 기사는 자신이 실수를 한 것이니 자신이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더니 땀을 잠시 식히고 출장비를 받은 후 현관 밖으로 나갔다. 나갈 때 의도적인 듯 문을 조금 세게 닫긴 했지만 시원한 바람으로 기분이 괜찮아진 성현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안쪽을 청소하지 않아서 여전히 시큼한 냄새가 나지만 시원한 바람이 부는 에어컨 밑에서 성현은 기분 좋게 핸드폰을 들어 유튜브를 틀었다. 태블릿은 아쉽지만 뱃속에서 끓던 화가 시원하게 냉각되는 기분이었다. 파워로 틀어 놓은 에어컨 바람의 소리와 유튜브 소리에 묻혀, 세차게 돌아가는 실외기 소리는 성현에게 들리지 않았다.


짧아진 봄의 자리를 차지한 여름의 초입. 성현이 사는 아파트 외벽에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실외기들이 함께 윙윙대며 뜨거운 바람을 바깥으로 내보내고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8. 그릇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