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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막무침 Aug 11. 2021

I'm full of the Blues.

#11. Im full of blues.


‘ 잠식은 아주 천천히 알아차리지 못하게 대상을 먹어들어가는 것이다. 대상이 그것을 알아챈 시점에서는 이미 몸 전체가 짐식 당한 뒤일 것이다. ‘


원하던 것보다 항상 빠르게 찾아오는 아침의 햇살 속에서 그는 뜨기 싫은 눈을 억지로 떴다. 눈꺼풀 위에 고드름처럼 앉아있는 눈곱을 비비며 힘겹게 몸을 일으킨 그는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실눈으로 휴대폰을 확인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평소에 보던 휴대폰의 색깔이 아니었다. 눈을 크게 뜨고 시야 각을 넓혀 침실을 바라보니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얀색 기종인 그의 휴대폰은 파란색으로 보였고, 매일 잠들기 전에 두 병씩 마시는 소주 병은 밝은 청록색으로, 베이지색으로 도배된 벽과 천장은 뭔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오묘한 색깔로 보였다.


마치 파란색 필터가 씐 것처럼, 모든 것에 파란색이 섞인 것처럼 보였다. 아침 댓바람부터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한참 눈을 비벼대던 그는 휴대폰으로 ‘세상에 파란색이 섞여 보여요.’, ‘색깔이 이상하게 보여요.’, ‘파란색 필터가 눈에 씌었어요.’ 등을 검색해봤지만 자신의 증상과 같은 내용을 찾을 수 없었다.


출근이고 뭐고 우선 병원에 가야겠다는 생각에 욕실로 자리를 옮긴 그는, 거울 앞에서 본능적인 들숨을 한번 크게 마실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비루한 몸을 가감 없이 비춰줘야 하는 거울에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의 어렴풋한 실루엣은 보이지만, 학창 시절 영어 단어를 암기할 때 빨간색 단어에 빨간 셀로판지를 대면 단어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온전한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급하게 자신의 팔다리를 살펴보았지만 흐릿한 잿빛의 형체만 보일 뿐이었다. 평소 본인의 깡마른 몸이 보기 싫었던 그였지만 이런 방식이기를 바란 것이 아니었다. 변기에 털썩 주저앉아 이리저리 욕실을 둘러보던 그의 눈에 파란색이었던 샤워타월이 들어왔다. 분명 파란색이었던 샤워타월이 지금 자신의 모습처럼 흐릿한 잿빛의 실루엣으로 보이고 있었다.




이게 이렇게 보이면 지금 자신은 평소의 피부색이 아니라 파란색으로 물들어있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와 동시에 병원을 가기는 해야 할 것 같은데 밖에 나가는 것 자체가 겁이 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볼 시선이 벌써부터 두려웠다.


한참을 변기 위에서 고민하던 그는 샤워를 하지 않고 나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자신의 몸을 보면 스스로의 존재가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어서였을 것이다.


초여름의 날씨지만 후드티를 뒤집어쓰고 커다란 마스크를 써 최대한 피부 노출을 줄인 뒤, 그는 밖으로 나갔다. 평소에도 옷을 이렇게 입는 터라 덥다는 느낌은 크게 들지 않았다.


하늘은 투명한 잿빛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분명 아주 선명한 파란색이겠구나 생각을 하며 그는 도보 10분 거리의 병원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길에서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만 같은 기분에, 저 사람들의 눈에도 내가 파란 인간으로 보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만 다른 인종이, 다른 인간이 된 것 같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좁디좁은 틈이지만 자신이 들어갈 자리가 있어 보였는데 지금은 그 어디에도 자신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았다. 길가에 주차된 차의 창문에, 상가의 통유리로 된 벽면에 얼핏 비친 자신의 모습은 평소보다 더 보잘것없이 움츠러들어 보였다.


바닥을 보며 빠른 잰걸음으로 걷다 보니 어느새 병원이 교차로 건너편에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신호등 앞에 서있던 그는 신호등의 초록불을 보자마자 빠르게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눈에만 초록불이었지 실은 잠깐 점멸하는 차량 신호등의 노란 불이었다. 평소 차량 신호등을 보고 건너는 것이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던 그는 무의식적으로 차량 신호등을 보고 있었고, 차량 신호등이 빨간 불일 때 보행자가 건너야 한다는 것을 잊은 채 초록불을 보자마자 길을 건넌 것이었다.


그렇게 그는 노란 불에 급히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지나가려던 차량과 부딪혔다. 평소 누구와, 무엇과, 심지어는 자신의 감정과 부딪혀도 나가떨어져 버리던 그의 비루한 육신과 정신은 잿빛 하늘 위로 잠시 붕 떠올랐다가 바닥에 처박혔다. 머리에서는 뜨거운 액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도로위에 누워 자신에게서 흘러나오는 액체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파랑에 잠식당한 인간에게서 나오는 혈액은 보라색이었다. 보라색 피를 흘리는 자신을 더이상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는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여러 색깔의 사람들이 자신에게 뛰어오는 것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그는, 저 사람들의 눈에 자신의 피가 어떤 색으로 보일지 생각하며 뜨기 싫은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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