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흙수저의 책상
1. 헌 책 한 권
문을 열고 들어서자, 오래된 종이 냄새가 먼저 맞았다.
중고서점. 책들은 책장에 가지런히 꽂혀 있기보다는, 쌓이고 넘어지고 다시 세워진 채로 숨을 쉬고 있었다.
그는 가게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구두는 닳아 있었고, 바지 끝에는 흙이 묻어 있었다.
주인은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건 오히려 편했다.
'사법시험 제1차 대비 법총론'
낡은 표지, 군데군데 접힌 페이지, 뒷면엔 누군가 연필로 이름을 썼다 지운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는 책을 들어 손에 쥐었다.
책은 묵직했다. 무게보다, 그 안에 담긴 시간 때문에 그랬다.
누군가는 이 책을 읽으며 꿈을 꿨고, 누군가는 이 책을 넘기다 포기했으며, 누군가는 이 책을 보고 시험에 붙었을 것이다.
그는 천천히 첫 장을 넘겼다.
글씨는 빼곡했고, 용어는 낯설었으며, 문장은 건조했다.
하지만 그는 그 안에서 기회라는 이름의 조각을 느꼈다.
“이 책 얼마예요?”
주인이 눈도 들지 않고 말했다.
“이천 원.”
그는 지갑을 열었다.
접힌 천 원짜리 두 장이 전부였다.
돈을 건넨 뒤, 책을 품 안에 안았다.
비닐도 없고, 가방도 없었지만 그 책이 젖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강하게 들지 않았다.
그냥, 이 무게를 온전히 느끼고 싶었다.
가게를 나와 거리로 걸었다.
바람은 거칠었고, 책등은 그의 가슴께를 차갑게 눌렀다.
그러나 그 차가움이 좋았다.
그건 무언가가 처음으로 자기 몸에 닿았다는 감각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한참을 그렇게 걸었다.
종이 냄새가 옷깃 안에 남아 있었고, 속은 빈 듯하지만 이상하게 든든했다.
집에 도착해 책을 내려놓을 때, 그 무게가 사라지는 것이 아쉬웠다.
그는 책을 펼쳐, 첫 페이지에 자기 이름을 적었다.
연필로 천천히, 눌러서.
그 이름이,
이 책 안 어디쯤엔가 꼭 닿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2. 진영의 방
방은 좁고, 조용했다.
창문은 작았고, 바람은 틈으로만 들어왔다. 벽지는 오래돼 눅눅했고, 책상은 동네에서 얻어온 것이었다.
다리가 약간 흔들렸고, 모서리는 조금 깨져 있었다.
그는 그 책상 앞에 앉았다.
어머니는 방해하지 않았다. 형은 늦게 들어왔고, 아버지는 마당에서 담배를 피웠다.
아무도 그에게 “공부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책을 펼쳤다.
활자들이 차갑게, 규칙적으로 줄지어 있었다. 첫 줄을 읽는 데 3분이 걸렸고, 두 번째 줄에선 의미가 사라졌다.
그는 다시 첫 줄로 돌아갔다.
바깥에서 개가 짖었다. 누군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갔고,라디오 소리가 담벼락 너머로 흘렀다.
그 소리들은 모두 공부에 방해가 되었지만, 그는 그 소리들 덕분에 자리를 뜨지 않을 수 있었다.
책장을 넘기다, 종이에 손가락이 살짝 베었다.
피는 나지 않았지만, 따끔했다.
그는 그 감각이 반가웠다.
무언가가 자기 손에 닿고, 자신을 뚫고 지나간다는 느낌.
밤이 되자 방은 더 어두워졌다.
그는 등을 켰다. 희미한 전구 아래, 책상과 책이 빛에 잠겼다.
불빛은 작았고, 페이지를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손 그림자가 글자 위를 덮었다.
공부는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한 시간 동안 한 쪽을 넘기지 못했다.
그는 한숨을 쉬지 않았고, 포기하지도 않았다.
창밖으로 바람 소리가 났다. 가지가 흔들렸고, 먼 데서 기차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세상은 멀었고, 지금 그는 종이 한 장 앞에 있었다.
책상 위에 손을 올려 뒀다.
손등에 잔기스가 있었다. 그건 이 책상에서 버틸 시간의 수만큼 늘어날 것이다.
그는 그렇게, 아무 말없이 첫날의 밤을 통과하고 있었다.
3. 접힌 책갈피
책갈피가 접힌 건, 한 번 이상 그 페이지를 펼쳤다는 뜻이었다.
그는 종이 모서리를 작게 접었다. 접힌 자리는 주름이 생겼고, 그 주름은 다시 펴지지 않았다.
한 장, 또 한 장.
하루에 읽는 양은 많지 않았다. 어떤 날은 한 쪽도 넘기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책상 앞에 앉는 시간만큼은 빠짐없이 지켰다.
오전은 눈이 흐렸다. 단어가 흘렀고, 집중은 자주 끊겼다. 바깥에서 개 짖는 소리, 기침, 밥 짓는 냄새. 그런 것들에 마음이 자꾸 흩어졌다.
오후가 되면, 종이 위 손 그림자가 길어졌다. 손가락이 저릿해졌고, 연필심이 쉽게 부러졌다.
저녁 무렵엔 방 안이 차가워졌다. 앉은 자세로 허리를 펴면, 엉덩이 밑에서 체온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사기잔에 보리차를 따라 놓고 식히듯 마셨다. 배가 고픈 건 아니었지만, 가끔은 속이 비어 쓸쓸했다.
하루 끝에는, 손바닥에 연필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물리적인 흔적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자국을 보면 마음이 조금 정리되었다.
그는 책갈피를 다시 접었다.
한 장을 넘긴다는 건, 하루가 지나갔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하루를 무너지지 않고 통과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종이 한 장을 넘기며 그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이것이 아무 의미 없는 시간이 아니기를.”
그렇게 다짐한 문장들이
조용히 책 속에 눌리고 있었다.
4. 시장통 소음
바깥이 시끄러웠다.
오늘은 장날이었다.
마을 방송이 장터 시작을 알리고, 확성기에서 흘러나온 음성이 골목 사이로 메아리쳤다.
그는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책장을 넘기려고 했지만, 문장 하나가 머릿속에 들어오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가게 트럭이 지나가며 경적을 울렸고, 어머니가 대문을 열고 나갔다.
발자국 소리, 대화, 짐받이 흔드는 금속성 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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