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문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제4장. 정의를 위한 변호

by 토사님

제4장 – 정의를 위한 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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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해의 작은 사무실

사무실은 좁았다.

창문은 바다 쪽을 향해 있었지만, 늘 해풍에 먼지가 끼어 있었다.

방에는 책상 하나, 의자 두 개, 법전 몇 권과 전화기.

그게 전부였다.

책상은 중고 가구점에서 구했고, 의자는 등받이가 흔들렸다.

첫 달은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광고도 없었고, 간판도 작았다.

그러다 어느 날, 작업복을 입은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얼굴엔 기름때가 묻어 있었고, 손등엔 오래된 상처가 선명했다.

그는 조용히 의자를 권했다.

남자는 말없이 앉았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봉투에서 종이 몇 장을 꺼냈다.

해고 통지서, 밀린 임금 명세서.

사장은 말을 바꿨고, 조합장은 책임이 없다고 했다.

그는 가만히 그 종이들을 읽었다.

말수는 적었고, 눈빛은 무거웠다.

노동자는 끝내 돈이 없다고 말했다. “상담료는… 나중에라도 드릴 수 있으면…”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남자는 놀란 듯 그를 바라봤고, 그는 창밖을 잠시 보았다.

바다는 잔잔했고, 먼 곳에서 배가 하나 지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첫 상담이 끝났다.

그날 저녁, 그는 사무실 불을 늦게까지 켜 두었다.

책상 위엔 오늘 받은 종이들이 펼쳐져 있었고, 옆엔 《근로기준법》이 놓여 있었다.

그는 다시 처음부터 조항을 읽기 시작했다.

글자 하나하나가 느리게, 그러나 분명하게 그의 머릿속에 들어왔다.

이 법이, 이 문장들이, 단지 조문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을 지킬 수 있는 울타리가 될 수 있다면.

그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창밖에 바람이 불었고, 책장 귀퉁이가 살짝 들렸다가 가라앉았다.

그 조용한 움직임 속에서,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이 길을 계속 걸어갈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느꼈다.

2. 낡은 신문, 낯선 이름들

사무실 책상 한쪽엔 늘 신문이 쌓여 있었다.

아침마다 습관처럼 읽었지만, 관심 있는 기사는 많지 않았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국방 소식, 대통령 동정, 해외 경제. 조간신문은 차갑고 반복적이었다.

그러다 한 줄에 눈이 멈췄다.

“부산 일대 용공사건 적발… 20여 명 검거.”

그는 신문을 내려다봤다.

활자는 흐릿했고, 문장은 딱딱했다. 하지만 그 안에 있는 이름들이 이상하게 낯설게 다가왔다.

20대 초반, 대학생. 인문학을 전공했고, 독서모임에 참여했다는 이유.

혐의는 국가보안법 위반.

그는 기사를 천천히 다시 읽었다.

사진은 없었고, 이름은 실명 대신 이니셜로 처리되어 있었다.

그런데, 읽을수록 마음 한쪽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일어나고 있었다.

책상에서 몸을 뒤로 젖혔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창문 유리를 흔들었고, 커튼이 살짝 들렸다.

이건 평범한 형사 사건이 아니라, 의도된 제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책장 안쪽에서 《형사소송법》을 꺼냈다. 그리고 그 옆에, 지난달 가져다 둔 《헌법》 해설서를 함께 펼쳤다.

구속 요건, 증거 능력, 자백의 임의성.

조문을 따라가며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법이 사람을 지키는 게 아니라, 사람을 잡아들이는 데 쓰이고 있는 건 아닐까.”

그는 책을 덮고, 다시 신문을 들었다.

기사의 아래쪽엔 담당 검사의 이름이 있었다.

그 옆엔 한 줄로 작은 공고가 붙어 있었다.

‘피고인의 변호인을 선임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 문장이 어딘가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오후가 되자,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혹시… 부림사건 관련해서… 면회를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

음성은 젊은 남자의 것이었고, 말끝이 자주 흔들렸다.

그는 말없이 메모지를 꺼냈다.

“사건번호, 이름, 면회 일시, 장소… 알려주십시오.”

짧은 정적 후, 전화 너머에서 이름들이 흘러나왔다.

신문에서 봤던 이니셜이, 이제 구체적인 사람의 목소리로 바뀌고 있었다.

그는 펜을 놓고, 수화기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날 밤, 그는 사무실 불을 켜 둔 채 앉아 있었다.

신문 한 장과 메모지 한 장.

그리고 그 위에 적힌 이름 하나.

그 이름이,

자기 삶을 어떤 방향으로 데려갈지 아직 알지 못했지만—

그는 이미 첫 걸음을 디뎠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3. 부산 구치소

철문은 묵직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 안은 바깥보다 어두웠다.

천장은 낮았고, 벽은 회색이었다. 공기는 눅눅했고, 어디선가 락스 냄새와 희미한 땀 냄새가 섞여 났다.

교도관이 앞장섰다. 그는 말없이 따라 걸었다.

통로를 지나 면회실로 향하는 발소리만 메아리쳤다.

“피고인 두 명 먼저.”

교도관이 말했고, 안쪽 문이 다시 열렸다.

두 청년이 들어왔다.

손은 묶이지 않았지만, 움직임은 작았다.

얼굴은 말라 있었고, 턱에는 짧은 수염이 자라 있었다.

눈은 또렷했지만, 동시에 무언가 닫혀 있는 느낌이었다.

그는 이름을 확인하고, 조용히 인사를 건넸다.

두 사람 모두 짧게 고개를 숙였다.

“폭행, 있었습니까.”

그는 처음으로 질문했다.

침묵.

잠시 후, 한 명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술 강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자백 내용, 사실과 다릅니까?”

이번엔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노트를 꺼내고, 짧게 적었다.

손이 떨리지 않았지만, 글씨는 평소보다 조금 더 깊게 눌려 쓰여졌다.

“왜 그 자백에 서명했습니까.”

한 청년이 천천히 말했다.

“잠을 안 재워서요. 무릎을 꿇리고 때리고…하도 오래돼서, 안 하면 못 나갈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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