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문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제5장 – 바보의 입성

by 토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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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 바보의 입성

1. 당선자 명단

오전 7시.

라디오가 말을 꺼냈다.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 당선자 명단을 말씀드립니다.”

그는 부엌에서 물을 끓이고 있었다.

창밖으론 안개가 옅게 깔려 있었고, 스텐 주전자 뚜껑은 김으로 미세하게 들썩였다.

라디오 속 목소리는 일정한 톤으로 이어졌다. “서울 강남갑… 서울 성동을… 부산 동구, 민정당 김○○…”

익숙한 이름들이 지나갔다.

그리고,

“부산 동구, 통일민주당 노무현.”

손에 들고 있던 컵이 멈칫했다.

아내가 마당을 쓸고 있었고, 아이들은 아직 이불 속에 있었다.

그는 말없이 물을 따랐다.

부엌의 나무 창틀은 약간 벌어져 있었고, 새소리가 아주 작게 들려왔다.

식탁 위에 놓인 식빵 한 장. 쨈을 바르지 않은 그 빵은,이상하게도 지금의 감정과 잘 어울렸다.

축하 전화는 오전 내내 걸려왔다.

대부분 짧았고, 어떤 목소리는 진심이었고, 어떤 건 도리였다.

그는 전화를 받고, 끊고, 다시 혼자 거실에 앉았다.

텔레비전 속에선 꽃다발을 든 당선자들이 손을 흔들고 있었지만, 그 장면은 마치 다른 날의 뉴스처럼 느껴졌다.

“기분이 어떠세요?”

아내가 물었다.

그는 웃지 않고 대답했다.

“뭐… 묘하지.”

오후엔 당사에 나갔다.

정당 사무실 앞에 붙은 A4 종이.

[제13대 국회의원 당선자]이름들 사이에, 자신의 이름이 있었다.

낯설었다.

사람들은 그를 ‘의원님’이라 불렀지만, 그는 그 호칭에 아직 반응하지 못했다.

사무실 의자에 앉아, 처음으로 복사용지를 꺼내 메모를 적었다.

_“이 이름이,

내 말과 손을 따라갈 수 있을까.”_

창밖으로 해가 기울고 있었다.

의자 등받이를 당기자 미세한 삐걱거림이 들렸다.

그리고 그날 밤, 그는 처음으로

‘정치를 한다’는 말이

스스로에게도 진짜처럼 들렸다.

2. 의정 연습

국회 본관은 생각보다 높지 않았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벽과 바닥, 계단과 문고리에서 낯선 무게감이 느껴졌다.

첫 출근 날. 그는 어두운 정장을 입었고, 손에 든 가방은 낡았지만 단단했다.

복도는 길었고, 벽엔 역대 의장 사진이 액자에 걸려 있었다.

보좌관은 아직 없었다.

사무실 앞 이름표에는 노무현 의원실이라고 새 종이가 꽂혀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책상, 전화기, 서류 캐비닛이 정렬돼 있었다.

책상 위엔 ‘초선의원을 위한 입법 안내’ 라는 책자가 놓여 있었다.

그는 그 책을 펼쳤다.

글씨는 작고 촘촘했다. ‘법률안 발의 절차’, ‘상임위 회부 기준’, ‘법안 작성법’.

문장들은 정확했지만, 이상하게도 사람의 체온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노트에 짧게 적었다.

“정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작은 종이였다.”

오전엔 인사 교육이 있었다.

신입 의원들이 일렬로 앉아 예산 구조와 윤리규정, 절차를 설명 받았다.

그 중 절반은 이해되지 않는 약어와 행정 용어였다.

강의실의 공기는 정적에 가까웠고, 질문은 없었다.

그는 앉은 자세를 조금 고쳤다.

책상 아래 손을 모은 채, 마음속으로 말했다.

“사람을 위한 자리에 왔다고 믿었는데, 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점심 시간이 되었을 때 동기 의원 몇 명이 모여 식당으로 향했다.

그는 뒤에서 따라갔다.

국회 식당은 조용했고, 그릇과 수저 소리만 들렸다.

자리에 앉자 누군가 물었다.

“사법시험 몇 회에 붙으셨죠?”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고시 공부할 땐, 그런 거 셌는데요. 이제는 잊었습니다.”

가볍게 웃음이 돌았다.

그러나 그 웃음은 곧 식판 위 고등어 조림처럼 금방 식고 말았다.

돌아오는 길, 그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혼자였다.

버튼을 누른 손끝에 땀이 약간 배어 있었다.

문이 열릴 때, 그는 생각했다.

“말이 살 수 있는 공간은 아직 저 문 너머 어딘가에 있다.”

3. 엘리베이터 안의 침묵

오전 9시 40분.

국회 본청 1층, 그는 회의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

엘리베이터 앞엔 몇몇 의원들이 서 있었다. 정장 재킷 위로 명패가 반짝였고, 손엔 서류철과 메모지, 어떤 이는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다.

인사는 없었다.

눈이 마주쳐도 고개를 끄덕이거나 말은 하지 않았다.

문이 열렸다. 모두가 조용히 탔다.

그는 맨 뒤 구석에 섰다.

버튼 위에 ‘5’층이 눌려 있었다. 닫힘 버튼을 누른 손이 멈칫했고, 조용히 손을 거두었다.

엘리베이터는 천천히 올라갔다.

기계음도 조용했고, 버튼 불빛만이 유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모두 앞을 바라봤지만, 아무도 서로를 바라보지 않았다.

한 의원이 가볍게 기침을 했다.

다른 이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그 짧은 움직임들이 전부였다.

그는 고개를 조금 숙인 채, 엘리베이터 바닥을 내려다봤다.

신발 끝에 약간의 흙먼지가 묻어 있었다.

오늘 아침, 마당에 잠깐 나갔다가 들어올 때 걸린 잔디였다.

5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모두가 흩어지듯 빠져나갔다.

인사는 여전히 없었다.

그는 뒤늦게 나왔다.

복도 끝 창문 밖으론 잿빛 하늘 아래 한강이 보였다.

강물은 흐르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혼잣말처럼 마음속에 적었다.

“같은 방향으로 올라가면서 누구도 옆을 보지 않는다.”

사무실 문을 열자 책상 위에 오늘 일정표가 놓여 있었다.

그는 펜을 들어 여백 아래에 조용히 한 줄을 썼다.

“정치는 말이라 했다. 지금은, 침묵으로 둘러싸인 말이다.”

4. 보좌관 없는 사무실

오전 8시 반.

그는 의원실 문을 열었다.

안은 조용했다.

커튼은 닫혀 있었고, 책상 위엔 어제 정리하지 못한 문서 더미가 남아 있었다.

보좌관은 아직 없었다. 사실, 아직 정식 채용도 되지 않았다.

사무실 전화는 혼자서 받았다. 응대도, 메모도, 문서 출력도 모두 혼자서 처리했다.

복사기가 벽 한쪽에 있었다.

그는 신문기사를 오려 붙인 자료를 한 장씩 넣어 복사했다.

기계가 작동하는 소리.

종이가 닿는 열, 어깨 너머에서 뿜어지는 미세한 바람.

그 온도마저 생생하게 느껴졌다.

복사가 끝난 문서의 모서리를 정리하고, 클립으로 묶었다.

펀치로 구멍을 뚫고, 파일 바인더에 끼워 넣었다.

누군가는 보좌관에게 시키는 일이었지만, 그는 이 일의 감각을 외면할 수 없었다.

종이가 가지는 두께, 손가락 사이를 미끄러지는 질감.

책상 앞에 앉아 그는 스스로 출력한 일정표를 다시 훑었다.

오후엔 상임위 예비회의가 있었고, 자료 요청 마감일도 표시되어 있었다.

그는 펜을 들고 메모의 빈칸 아래 한 줄을 썼다.

“정치의 시작은 손이다. 누군가 대신하지 않는 손.”

문밖을 나서며 그는 불을 끄지 않았다.

사무실의 전등은 오전 햇살보다 더 약했지만, 그 불빛 아래 놓인 책상 위엔 그의 자리가 분명히 있었다.

5. 청문회 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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