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시민의 후
제7장 – 시민의 후보
1. 아무도 없는 출발선
천막 안 공기는 아직 덜 마른 콘크리트 냄새를 품고 있었다. 노란 현수막이 천장 끝에 고정되어 있었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 캠프 개소식’ 이라는 글씨가 정면 벽에 붙어 있었다. 플라스틱 의자들이 차곡차곡 놓여 있었지만, 절반은 비어 있었다.
기자석에는 세 명의 기자가 앉아 있었고, 카메라는 단 한 대였다. 테이블 위엔 편의점 삼각김밥 몇 개와 일회용 커피잔, 한 구석엔 초라한 화환 두 개. 하나는 친구가 보냈고, 하나는 아내가 보냈다. 리본엔 단정한 글씨로 적혀 있었다.
“사람 사는 세상, 다시 시작합니다.”
노무현은 회색 양복을 입고 무대로 올라섰다. 마이크는 멀쩡했기 때문에, 음향 테스트를 해볼 필요는 없었다. 조용했다. 아무도 웅성이지 않았다. 박수도 짧았다.
그는 눈을 한번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말했다.
“오늘, 이 자리에 많은 분들이 오시지는 않았습니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목소리는 낮았고, 또박또박했다. 그는 원고를 보지 않았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불가능하다고. 조직도 없고, 돈도 없고, 뿌리도 없다고.”
그는 잠시 멈추었다. 뒤쪽에서 지지자 몇 명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저는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말을 믿습니다. 그리고, 들을 귀가 있는 국민을 믿습니다.”
기자 중 한 명이 펜을 멈췄다. 그는 고개를 들고, 그 눈을 바라봤다.
“정치는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죠. 그 마음이, 지금부터 이 캠프의 유일한 연료입니다.”
조용한 박수가 이어졌다. 그것은 형식적인 것도, 폭발적인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박수는 벽에 닿고, 천막을 흔들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오늘 이 자리가 작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시작되는 말은, 곧 커질 수 있습니다. 언젠가 이 말을, 우리 모두 함께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가 무대에서 내려왔을 때, 기자 한 명이 다가와 조용히 물었다.
“후보님, 지금 지지율 2%입니다. 진짜 시작하시는 겁니까?”
그는 웃지 않았다. 고개만 끄덕였다.
“시작은 항상, 아무도 없을 때 하는 거니까요.”
2. 댓글 31개
개소식 다음 날, 사무실은 조용했다. 캠프라기 보다는, 좁은 방 하나와 컴퓨터 두 대, 복사기 하나. 벽엔 낡은 지도 한 장이 붙어 있었고, 책상 위엔 빈 종이컵과 진한 커피 자국이 남아 있었다.
보좌관 하나가 조용히 컴퓨터 앞에 앉아 웹사이트 하나를 열었다. 당시만 해도 흔치 않았던 ‘정치인 게시판’. 자신들의 캠프 이름으로 올린 첫 글,〈노무현 후보를 지지합니다〉라는 제목의 게시글 아래 댓글이 하나 둘 씩 붙고 있었다.
처음엔 세 개였다. “그 사람, 말은 시원하게 하더라.”, “안 될 줄 알지만, 응원은 해봅니다.”“또 떨어지진 않겠죠?”
그리고 조금 후—댓글은 여섯 개, 열 개, 스물하나… 서른하나가 되었다.
보좌관은 조용히 말했다.
“서른하나입니다. 다들… 이름도 안 썼습니다. 닉네임뿐이에요.”
그는 모니터를 들여다 보았다. 익명의 누군가들이 남긴 말. 응원과 의심이 섞인 문장들. 그러나 분명, 누군가의 말이었다.
‘어떤 정치인이 진심 같아 보이기는 오랜만이다.’, ‘그 사람, 떨어져도 계속 나왔지요?’‘이기는 사람 말고, 끝까지 말하는 사람은 처음입니다.’
그는 모니터를 오래 들여다봤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말이, 가긴 가는군요.”
보좌관은 물었다.
“이런 게 큰 의미일까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다시 끄덕였다.
“처음 닿는 말은, 작게 시작하는 법이죠. 작고… 오래 남는 법이에요.”
그날 밤, 그는 노트 한 귀퉁이에 적었다.
“댓글 서른하나. 세상 어딘가에 서른한 명의 말이 내게 왔다.그 말들, 내가 끝까지 들을 것이다.”
3. 노란 손수건
부산역 앞 광장.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졌다. 가방을 든 학생, 점심 장을 본 노부부, 유세차 앞을 무심히 지나치는 사람들.
노무현은 작은 스피커 앞에 섰다. 음량은 낮았고, 연설문도 없었다. 그는 마이크를 손에 들고, 거리 위를 바라보았다. 누군가는 고개를 돌렸고, 누군가는 멈춰 섰다.
“여러분, 저는…지금 여러분 앞에서 처음으로, 이기고 싶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는 웃지 않았다. 박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기고 싶은 이유는 제가 아니라, 이 말을 더 오래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말이 공기 속으로 퍼졌다. 그때였다.
왼편에서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노란 손수건이었다. 형광색도, 진한 금색도 아닌—햇볕에 오래 있던 듯 빛바랜 노랑.
그 손수건이 바람에 흔들렸다. 처음엔 하나였다. 그 다음엔, 광장 반대편에서 또 하나가 올라갔다. 그리고 또 하나.
어떤 이는 얼굴을 가린 채, 어떤 이는 조심스레 흔들었다. 이름도, 얼굴도, 어디서 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들이 말 대신 색으로 대답했다는 것이었다.
노무현은 말없이 그 손수건들을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다시 마이크를 들었을 때, 목소리는 전과 같았지만, 그 안의 무언가는 달라져 있었다.
“저는, 이 손수건들을 기억하겠습니다. 이 색이, 말보다 먼저 웃게 해주네요.”
그리고 아주 짧게, 웃었다. 광장에서 처음으로 박수 소리가 들렸다. 크지 않았지만, 그보다 더 큰 움직임은 없었다.
그날 밤, 캠프 사무실. 책상 위에 누군가 두고 간 손수건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접혀 있었고, 모서리에 작게 이렇게 적혀 있었다.
“우리는 지지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당신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손수건을 접어 노트 안에 넣었다. 그리고 펜을 들어 썼다.
“이 손수건은, 내가 누구를 위해 말하는지 잊지 않게 해줄 것이다.”
4. 눈물의 제주
제주 경선 결과가 발표된 건 오후 네 시였다. 패배였다. 예상보다 더 큰 격차였다. 캠프는 조용했고, 기자들은 흩어졌고, 지지자들은 아무 말없이 현장을 떠났다.
숙소로 돌아왔을 때, 노무현은 문을 닫고 아무 불도 켜지 않았다. 침대에 앉아 양말을 벗고, 신발을 문 옆에 밀어 두었다. 창밖엔 어스름이 남아 있었고,바다 쪽에서 바람이 길게 불어왔다.
그는 말이 없었다. 책상 위엔 오늘의 유세 원고가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아무도 듣지 못한 말, 누구에게도 닿지 못한 문장들.
그는 그것을 바라보다, 책장을 덮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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