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단일화의 밤
제8장 – 단일화의 밤
1. 끝없는 조건문
서울 삼청동, 늦은 밤.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회의실 창은 흐렸다.천장에 박힌 조명이 멀게 느껴졌다.
노무현은 회색 와이셔츠 차림으로 앉아 있었다.정면에는 정몽준 후보 측 인사 두 명이,양옆엔 노무현 캠프의 참모들이 조용히 메모를 넘기고 있었다.
대화는 두 시간 넘게 이어졌다.단일화—한 단어였지만,그 단어 앞뒤로 끝없는 조건문이 붙었다.
“표본은 유권자 전체입니까, 야권 지지층입니까?”“질문 문항에 ‘단일후보’라는 단어는 넣습니까?”“패배 시 사퇴는 자동입니까, 추후 논의입니까?”
공기가 건조했고, 말은 길었다.누구도 먼저 나서서 결론을 내리려 하지 않았다.
정몽준 쪽에서 먼저 말을 꺼냈다.“정 후보께선 여론조사 방식으로 결정을 원하십니다.그게 가장 빠르고, 명료하고, 국민들도 납득할 겁니다.”
참모 하나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그 방식을 제안하시는 이유는정 후보 쪽의 지지율이 더 높기 때문 아닙니까?”
잠시 정적이 흘렀고,상대는 웃지도, 부인하지도 않았다.
노무현은 말이 없었다.메모지에 ‘정권재창출’, ‘원칙’, ‘타협’이라는 세 단어를 적고,그 아래에 덧붙였다.이기는 것보다 지켜야 할 것.
그는 불리함을 알고 있었다.인터넷 지지층은 많았지만,묻는 방식에 따라 결과는 뒤집힐 수 있었다.
“후보 단일화는 약속이었습니다.방식이 저에게 불리해도,시민과의 약속은 바꾸지 않겠습니다.”
그는 말했다.말은 단호했지만, 감정은 억제되어 있었다.
“이건 승리하기 위한 협상이 아닙니다.정치를, 조금이라도 다르게 만들 수 있다는 신념을놓치지 않기 위한 선택입니다.”
정몽준 측은 여론조사 문항을 제시했다.'이회창 후보와 경쟁할 수 있는 후보는 누구입니까?'
캠프 안에서 반발이 있었다.질문이 애매했고,이름 순서도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조용히 말했다.“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감수해야죠.”
그는 이미 마음속에 결과를 넣어둔 사람이었다.손익보다 신뢰를 먼저 세우는 사람,이기는 것보다 지켜야 할 말의 무게를 아는 사람이었다.
합의서 초안이 돌아왔다.그는 묵묵히 읽었고,그 뒤에 검은 펜으로 사인했다.
잉크가 종이 위로 번지는 소리를 들으며그는 눈을 감았다.그 순간, 피로가 천천히 내려앉았다.
정몽준 측 인사가 손을 내밀었다.그는 그 손을 맞잡았다.악수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와 그는 책상에 앉았다.창밖은 흐렸고, 방 안은 조용했다.그는 메모지 한 귀퉁이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오늘 진 게 아닐지도 모른다.다만, 더 고독한 길을 택했을 뿐이다.
불을 끄지 않은 채, 그는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그 밤,그의 말은 여전히 그를 지키고 있었다.
8-2. 악수
서울 여의도.낮 11시.기자회견장 안은 낯선 조명으로 환했다.카메라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하얀 플래카드 위에 ‘단일후보 발표’라는 검정 글씨가종이처럼 얇게 떠 있었다.
노무현은 일찍 도착해 있었다.정몽준은 예정 시간보다 5분 늦게 도착했다.그들은 나란히 서 있었지만,몸의 각도는 어딘가 평행하지 않았다.
사회자가 발표문을 읽었다.단일화 경과, 여론조사 방식, 국민과의 약속.형식적인 말이 끝난 뒤,두 후보가 차례로 단상 앞에 섰다.
노무현은 먼저 고개를 숙였다.“이 단일화는 정치적 타협이 아니라 국민적 요청에 대한 응답입니다.”
그는 준비된 문장을 버리지 않았고, 감정을 앞세우지도 않았다.
“국민이 묻고, 우리가 답했습니다.남은 시간, 더 낮게, 더 조심스럽게 걷겠습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그는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그 말은 아직 쓸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정몽준은 짧게 발언했다.원칙, 대의, 신뢰.단어들은 정확했지만그의 목소리는 눈과 닿지 않았다.
말이 끝나자사회자는 두 사람의 악수를 요청했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노무현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정몽준은 미묘하게 주춤했지만, 결국 그 손을 잡았다.
악수는 짧았다. 그 짧은 접촉 속에얼마나 많은 계산과 망설임, 불신과 의무가 들어 있었는지는사진으로 남지 않았다.
플래시가 터졌다. 셔터 소리가 무대를 채웠다.기자들 사이에선 "이겼다"는 속삭임이 돌았고, 그 순간만큼은누구도 결과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형식은 갖춰졌고, 그 이상의 말은 누구도 하지 않았다.
기자회견이 끝난 뒤,노무현은 혼자 건물 밖으로 나왔다.바람이 불었고,회색 수트의 옷자락이 천천히 흔들렸다.
한 기자가 조용히 따라와 물었다.“지금, 기분이 어떠십니까?”
그는 잠시 멈췄다가 짧게 대답했다.
“기분보다, 표정이 중요할 때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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