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문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9장. 청와대의 바보

by 토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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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 청와대의 바보

1. 비서관 회의

청와대 집현실. 2003년 2월. 대통령 취임 후 첫 비서관 회의.

하얀 벽, 정제된 조명, 테이블은 U자형으로 놓였고, 문서철이 각 자리마다 가지런히 정리돼 있었다.

노무현은 자리에 앉자 마자 문서철을 닫았다. 그리고 손가락을 깍지 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다들 앉으시죠.”

비서관들이 착석했다. 수석비서관, 행정관, 정무비서, 국정홍보팀…모두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말했다.

“오늘부터, 이 회의엔 ‘지시’라는 말이 없습니다.”

한 명이 고개를 들었다. 다른 이들은 정면을 보거나, 메모장만 응시했다.

“보고는 하십시오. 그러나 내가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는 방식은 지양하겠습니다. 정책은 여러분이 만들고,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공기가 묘하게 떨렸다. 적막이 흘렀고,몇 명은 펜을 돌렸다.

그는 잠시 멈췄다가 말했다.

“‘시스템으로 일하자.’ 이게 내가 정치 시작하면서부터 해온 말입니다. 사람 따라 바뀌는 나라 말고, 원칙 따라 굴러가는 청와대. 우리가, 한 번은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무비서관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대통령님, 다만… 그런 문화가 되려면, 시간이 좀 필요할 겁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은 ,누군가는 그 시간을 버텨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죠.”

그 말에, 비서관 중 몇 명의 얼굴에 조용한 긴장이 스쳤다.

그는 회의자료 첫 페이지를 열었다. 국정 브리핑 일정표. 빽빽한 보고 라인.

“이런 건, 줄입시다. 두 단계 거칠 걸 한 단계로. 보고는 간결하게. 내가 모르는 것도 괜찮습니다. 대신, 국민이 알게는 해주세요.”

기록관은 그 말을 받아 적었다. ‘국민이 알게는 해주세요.’

회의는 서서히 끝을 향해 갔다.

그는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앞으로 내가 자주 하는 말이 있을 겁니다. ‘모르겠다.’ 그 말이 약한 게 아니라, 함께 묻자는 뜻입니다.”

비서관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회의가 끝났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뒤, 그는 집현실에 혼자 남아 커피 한 잔을 마셨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 회의는 시작이 아니라, 저항의 예고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바보처럼 밀고 가는 수밖에.”

2. 관저의 책상

밤 11시 20분. 관저의 불은 대부분 꺼져 있었다. 식당, 거실, 회의실까지 모두 정리된 뒤, 2층의 작은 서재만 희미한 불빛을 품고 있었다.

책상 위엔 정책 보고서가 쌓여 있었다. 외교 브리핑, 노동시장 유연화 검토안, 농가 부채 관련 민원 요약…그는 그것들을 차례로 펼쳤다.

볼펜을 손에 쥐었지만, 표시는 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읽고,몇 장은 다시 덮었다.

바깥엔 바람이 불고 있었다. 창틀이 가끔씩 떨리는 소리 외엔관저는 숨을 쉬지 않았다.

그는 잠시 고개를 들었다. 책상 맞은편, 벽 한쪽엔 가족 사진이 있었다. 권양숙 여사와 손자,그리고… 웃고 있는 자신의 얼굴.

그 웃음이, 지금 이 순간엔 조금 멀게 느껴졌다.

다시 보고서를 펼쳤다. 농민 단체가 보낸 진정서 요약.“쌀값 보장 없이는 생존 어렵습니다.”그는 그 문장을 세 번 읽었다.

그리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생존…이라.”

그는 한참 말이 없었다. 그리고 문장을 종이에 옮겨 적었다.

“정책은 통계가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의 말에서 시작돼야 한다.”

컴퓨터를 켜고, 국민청원 게시판을 열었다. 어떤 이는 아파트 분양가를, 어떤 이는 자식의 군입대를, 어떤 이는 파업 중 해고된 동료 이야기를 남겨두었다.

그는 그 글들을 오래 읽었다. 답하지 못하면서도, 놓지 못하는 마음으로.

자정을 넘긴 시각. 창밖은 어두웠고, 손등 위엔 커피 얼룩이 번져 있었다.

그는 책상을 정리하지 않았다. 대신 마지막으로 한 줄을 노트에 적었다.

“이 책상은, 결정보다 들을 귀가 필요한 자리다.”

그리고 불을 껐다.

3. 시스템의 정치

청와대 1층 상황실. 문이 닫히자 공기가 달라졌다.정책조정비서관, 정무수석, 홍보수석, 민정수석이 차례로 자리에 앉았다.테이블엔 프린트물과 노트북,그리고 정적이 놓여 있었다.

노무현은 회의자료를 앞에 두지 않았다. 손에는 빈 메모지만 들려 있었다.

“오늘은 좀… 불편한 이야기 합시다.”

말은 부드러웠지만, 누구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지시 안 하고 시스템으로 일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꾸,‘지시가 없어서 일 못 하겠다’는 말이 들립니다.”

정무수석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통령님, 현업 부서들이 대통령께서 ‘오케이’ 해 주신 걸 사인 없이 진행하길 꺼립니다. 어느 선까지 책임질 수 있느냐는 부담도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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