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문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제10장. 탄핵과 시민

by 토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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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 탄핵과 시민

1. 책상 위의 침묵

2004년 3월 12일, 오후. 국회 본회의장 전광판에 숫자가 떴다. 193명 중 193명 투표, 가결 193.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 가결.”

청와대 2층, 대통령 집무실. 그는 말없이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전화벨도 울리지 않았고, 밖에서도 아무 문 두드리는 소리 없었다.

책상 위엔 남아 있던 문서 두 장. 한 장은 노동정책 보고서, 다른 한 장은 그가 직접 쓴 유세 발언 요약이었다.

그는 아무 것도 펴지 않았다. 손을 책상에 올려놓고, 검지로 천천히 나무결을 따라 쓸었다.

세상의 말이 멈춘 것 같았다. 뉴스는 숫자만 말했고, 정치인들은 반응만 정리했고, 시민들의 말은 아직 어디에도 도착하지 않았다.

그는 창밖을 보았다. 산 너머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고, 서울 시내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가‘ 이 말이 어디에서 끊겼는가’를 생각했다.

그는 입술을 열지 않았다. 눈을 감고, 생각했다.

“정치란 무엇인가. 말이 멈춘 자리에 남겨진 침묵이 정치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보좌관이 조용히 들어와 말했다.

“대통령님, 법률상으로는 지금부터 직무 정지 상태입니다. 내일부턴 총리가 직무를 대행합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이미 마음속에서 지나간 이야기였다.

“내가 내일도 여기 나와 앉으면, 법적으로는 문제인가요?”

보좌관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직무는 정지되셨지만, 자리는 지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웃지 않았다. 다만 조용히 말했다.

“말이 끊겼다고 존재까지 끊긴 건 아니죠.”

그날 밤, 그는 마지막으로 책상 위에 메모지 한 장을 남겼다.

“나는 지금도 이 자리에 있다.”

2. 사라진 명패

2004년 3월 13일, 오전 8시 15분. 청와대 본관 2층, 복도 끝.노무현은 말없이 걸었다.

어제와 다르지 않은 동선. 비서관들과 아침 인사도, 차 한 잔도 생략된 채 그는 문 앞에 섰다.

그 문에는 원래 작고 단단한 명패가 붙어 있었다.

‘대통령 노무현.’

그러나 그날 아침,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나무판의 자국만 남아 있었다. 거기 무언가가 붙어 있었음을 말하는, 미세한 흔적의 그림자.

그는 잠시 서 있었다. 눈을 치켜들지도 않았고, 손을 뻗지도 않았다.

그저, 그 자리를 바라보았다.

이름이 사라진 자리에서, 자신의 자리를 다시 느꼈다.

누군가 옆에서 말을 하려다 멈췄다. 그도 멈췄다.

“…잘했습니다.”그가 말했다. 누군가를 향한 말이었지만,아무도 그것을 받지 않았다.

그는 문을 열지 않았다. 그냥, 서 있었다.

복도엔 종이 넘기는 소리, 전화벨 울리는 소리, 커피 향기 같은 것들이 스쳤다.

그는 그것들보다 조용했다.

이제 자신은 ‘이름 없는 자리’에 존재한다는 것, 그 사실이 그를 더 단단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 그는 그것을 말하지 않고 알았다.

잠시 후, 그는 돌아섰다.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 뒤에 남은 건 명패 없는 나무판. 그리고 멈춰 선 시간 한 조각.

그날, 그는 아무 회의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저 관저의 책상 앞에 앉아 메모지에 한 줄을 남겼다.

“이름을 잃은 자리에서, 나는 나를 증명해야 한다.”

3. 헌법이라는 벽

청와대 관저. 책상 위에 놓인 서류철엔 ‘헌법재판소 탄핵 심판 청구서 초안’이라는 표지가 붙어 있었다.

비서관은 그걸 들고 들어와 조심스럽게 말했다.

“헌재 쪽에서 최대한 빠르게 심리 일정 잡겠답니다. 헌법재판소에선… 대통령님을 ‘사람’으로가 아니라 ‘제도 안의 행위’로 판단한다고 합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아니라, 몸으로 이해했다는 뜻이었다.

“지금은 그게 오히려 더 위로가 되네요.”

그는 웃지 않았다.

책상 건너편에 놓인 작은 책, 헌법책을 손에 들었다. 얇고, 검은색 가죽 표지에 ‘대한민국 헌법’이라는 금박 글씨.

그는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제1장 총강. 제2장 국민의 권리와 의무. 제5장 행정부.

어느 한 조항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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