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문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11장. 점점 무거운 어깨

by 토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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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 – 점점 무거운 어깨


1. 어깨 위의 종이들

청와대 2층, 집무실. 아침 회의가 끝난 뒤, 비서관은 늘 그렇듯 서류철을 책상 위에 놓고 나갔다.

노무현은 손을 뻗어 첫 장을 열었다. ‘공공기관 지방 이전 3단계 추진안’. 맨 앞 장에 빨간 글씨.

“정치적 부담 우려. 여당 내 이견 다수. 보류 권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장을 넘겼다. ‘검찰 기소독점권 조정 관련 검토’. 맨 하단에 짧게 쓰인 문장.

“사법부 및 법무부 강한 반발 예상. 현시점 추진 부적절.”

한 장, 또 한 장. 서류는 많았고, 그 문장들은 다 달랐지만 말하고 있는 건 같았다.

지금은 아니다. 여기는 아니다. 너는 아니다.

그는 서류를 다시 가지런히 정리했다. 책상 왼쪽 한켠에 그렇게 놓여 있는 서류철이 점점 탑처럼 높아져 있었다.

비서실장이 들어왔다.

“오후 회의 일정입니다.”

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다 똑같은 내용입니까?”

실장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큰 변화 없습니다. 추진보단 보고가 많고, 보고보단 설명이 많고, 설명엔 주어가 없습니다.”

그는 미소도 짓지 않았다. 그냥 메모지에 한 줄을 적었다.

“국정의 말에서 주어가 사라지면 결정은 사라진다.”

그리고 그 아래, 작게.

“말은, 지금 여기선 결정이 아니라 면책이 된다.”

그는 다시 책상에 손을 올렸다. 손목이 약간 굳어 있었다. 어깨가 내려앉는 느낌.무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느껴졌다.

그는 속으로 말했다.

“이건 종이가 아니라, 말이 나를 누르고 있는 것이다.”

그날 저녁, 비서관이 퇴근 인사를 하며 물었다.

“대통령님, 내일 회의는 줄일까요?”

그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줄이지 마세요.”

“말이 줄면 생각도 줄고, 생각이 줄면 그 다음부턴 침묵조차 남지 않습니다.”

그는 책상 위의 서류철을 다시 정리했다. 묵직한 종이 더미. 그러나 그의 어깨 위에서, 그것들은 말보다 무거웠다.


2. 세종이라는 말

2004년 10월 21일.헌법재판소, 전원합의체.

“행정수도 이전은 관습헌법상 수도 개념에 반하며 국회가 아닌 국민투표로만 결정 가능하다. 위헌이다.”

TV 뉴스 화면 아래 그 문장이 자막처럼 흐르고 있었다.

청와대 관저, 노무현은 리모컨을 들고 화면을 껐다.

말없이, 오래 앉아 있었다. 마치 그 문장을 아직 다 듣지 못한 사람처럼.

그날 오후. 대국민 담화를 준비하는 회의. 비서진은 ‘유감 표명’, ‘헌재 존중’, ‘추후 협의’라는 표현을 조심스럽게 정리했다.

그는 말을 줄였다. “국민에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드려야 합니다.”

“변명도 아니고, 승복도 아니고, 다만…이 말을 지키기 위해, 이 자리에 서는 겁니다.”

저녁 6시, 대통령 공식 발표. 카메라는 조용했고, 그는 원고를 보지 않았다.

“시민 여러분, 오늘 헌법재판소는 저희 정부가 추진해 온 행정수도 이전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렸습니다.”

목소리는 단정했고, 말은 느렸다.

“이 말은 제가 가장 믿었던 말 중 하나였습니다. 수도권 집중 해소, 지방 분권, 국가 균형 발전…이건 정치가 아니라 공정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존중합니다. 그러나 그 결정 이후에도 이 말의 의미를 지키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겠습니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지 않았고, 박수도 없었다. 그저 말만 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정치는 실패해도 말은 남습니다. 세종이라는 말, 그 뜻은 아직 살아 있습니다.”

발표가 끝난 뒤, 그는 조용히 단상을 내려왔다.

기자들은 말을 걸지 않았다. 참모들도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관저로 돌아가는 길, 그는 노트에 한 줄을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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