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기술, 그리고 교실의 기적. 1장 기억의 메커니즘
시험을 보던 어느 날, 한 학생이 눈을 질끈 감았습니다.
어제까지는 분명히 외웠던 수학 공식이었는데, 문제지를 보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습니다.
그 아이는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내 머리는 왜 이 모양일까.”
사실 잘못은 아이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뇌는 원래부터 작은 무대를 가진 배우였습니다.
심리학자 코완(Cowan, 2001)은 연구 끝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작업기억은 동시에 네 개 안팎의 정보 단위만 유지할 수 있다.”
옛날에는 ‘7±2’라고 불렀지만, 그마저도 과장이었습니다.
우리의 뇌는 사실, 넓은 경기장이 아니라 소극장 무대에 가깝습니다.
무대 위에 다섯 번째 배우가 올라오면 어떻게 될까요?
가장 오래된 배우가 퇴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화번호 아홉 자리를 외우려 하면 금세 헷갈리고, 시험장에서 여러 개의 공식을 한꺼번에 기억하려 하면 머릿속이 엉망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좌절할 필요는 없습니다.
무대가 작다는 건,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 분명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단서를 붙이고, 조명을 비추고, 음악을 깔아주면, 배우들은 훨씬 오래 관객의 마음에 남습니다.
아이들이 시험장에서 느끼는 “머릿속 공백”은 실패가 아니라,
무대를 잘 연출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좋은 연출가는 배우 수가 적어도,
관객을 울리고 웃기는 장면을 만들어냅니다.
기억도 똑같습니다.
지금 제가 숫자 아홉 자리를 드리겠습니다.
173849526
한 번에 외우려 하지 말고,
마치 무대에서 네 명의 배우가 연기하듯,
네 자리씩 잘라보세요.
1738 / 4952 / 6
자, 이제 무대는 혼잡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작업기억을 이해한 연출의 시작입니다.
“아이의 머릿속 무대가 비좁다고 걱정할 필요 없다.
배우는 네 명뿐이지만, 무대는 언제나 살아 있다.
조명을 어떻게 비추고, 장면을 어떻게 나누느냐에 따라
그 무대는 평생 잊히지 않을 연극이 된다.”
어느 날 수업 시간, 한 아이가 제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왜 전화번호는 항상 잘라서 써요?”
칠판에 010-1234-5678을 적어주자,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런데 그걸 붙여서, 01012345678이라고 쓰자마자 여기저기서 투정이 터져 나왔습니다.
“헷갈려요!”
“순간에 다 못 외워요.”
그렇습니다.
기억은 ‘조각’을 덩어리로 묶을 때 비로소 길을 잃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걸 청킹(chunking)이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어,
911007365
이 숫자 9자리를 그대로 외우라고 하면 머리가 금방 포화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바꿔봅시다.
911: 위급 전화
007: 제임스 본드
365: 1년의 날짜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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