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심리·대응·회복, 우리에게 필요한 한 권. 4장. 공급망의 탄
우리는 흔히 사기를 떠올릴 때, 교묘한 말솜씨로 피해자를 속이는 ‘개인 범죄자’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보이스피싱, 전세 사기, 투자 사기 등은 단순한 개인의 일탈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하나의 산업처럼 움직이고 있습니다. 범죄자 혼자서 꾸며낸 연극이 아니라, 배우·무대·소품·조명·관객까지 모두 동원된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돌아가는 거죠.
예를 들어, 보이스피싱 한 건이 성사되기 위해서는 먼저 불법 개통폰이 필요합니다. 추적을 피하기 위해 명의가 도용된 휴대폰이 공급되고, 그 뒤에는 휴대폰 매장과 브로커가 얽힌 시장이 있습니다. 피해자가 돈을 송금하면, 그 돈은 대포통장을 거쳐 빠르게 다른 계좌로 흘러갑니다. 다시 환치기를 통해 해외로 흘러가고, 결국 해외 합숙 콜센터의 범죄자 손에 들어가죠. 경찰은 피해자의 통장을 잡아도, 그 뒤에 숨어 있는 국제적 공급망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기의 공급망입니다.
휴대폰은 ‘연결’의 도구가 아니라 ‘범죄의 출발점’이 됩니다.
통장은 ‘신뢰의 보증’이 아니라 ‘돈 세탁의 파이프라인’이 됩니다.
해외 콜센터는 단순한 사무실이 아니라, 수백 명이 합숙하며 범죄만을 위한 공장이 됩니다.
이 공급망은 개인 한 명의 욕심으로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조적이고, 조직적이며, 무엇보다 국제적입니다. 한국에서 시작된 돈이 몇 시간 만에 라오스, 캄보디아, 중국, 심지어 유럽까지 흘러가는 현실은 우리를 경악하게 만듭니다.
따라서 이 장에서 우리는 사기의 현장을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으로 바라보려 합니다. 왜냐하면 범인을 잡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잡히는 한 명 뒤에는 또 다른 열 명이, 그 뒤에는 수십 명이 같은 방식으로 움직입니다. 결국 우리가 진짜 싸워야 하는 상대는 ‘그림자 네트워크’, 즉 사기범죄를 키워내는 공급망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이 네트워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까이 있다는 점입니다. 동네 은행 ATM, 중고 거래 앱, 무심코 가입한 소액결제 서비스, 해외여행지에서 들려오는 낯선 전화. 그 모든 것들이 범죄의 톱니바퀴가 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묻습니다.
“사기는 누가 벌이는가?”라는 질문보다,
“사기는 어디에서 태어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할 때입니다.
이 장은 바로 그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촘촘한 통신망을 갖춘 나라입니다. 휴대폰은 이제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신분증·지갑·열쇠를 모두 대신하는 삶의 중심 도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강력한 도구가 범죄자들에게는 사기의 첫 번째 무기로 변합니다.
범죄자들은 직접 휴대폰을 개통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이름으로 만들면 곧바로 추적당하기 때문입니다. 대신 도용된 주민등록증, 위조 신분증, 심지어 길에서 주운 학생증까지 활용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휴대폰은 흔히 ‘유령 개통폰’이라 불립니다.
또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이 소액의 대가를 받고 자신의 명의를 빌려주기도 합니다. “당신 이름으로 휴대폰만 열 개 만들어 주면 몇 십만 원 드리겠다”는 식의 제안은 취약계층에게 달콤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이 휴대폰은 곧 보이스피싱에 쓰이고, 결국 경찰이 찾아오는 순간 **“당신도 공범”**이 됩니다.
인터넷 카페나 텔레그램 채널에는 여전히 ‘대포폰 구합니다’, ‘3개월 사용 보장’ 같은 글들이 암암리에 올라옵니다. 범죄자들은 수십, 수백 대의 중고폰을 한꺼번에 사들여, 다시 개통해 사용합니다. 이 시장은 빠르고 은밀하며, 한 번 발을 들이면 거래 기록이 남지 않습니다. 피해자가 경찰에 신고해도, 그 휴대폰은 이미 수십 명의 손을 거쳐 다른 범죄 현장에서 쓰이고 있습니다.
통신사들은 명의 도용 방지를 위해 ‘본인 확인 절차’를 강화하고, 1인당 개통 대수를 제한합니다. 그러나 범죄자들은 제도의 허점을 비집고 들어옵니다. 심지어 일부 부도덕한 판매점 직원들이 브로커와 결탁해 **“서류만 맞으면 무조건 개통”**을 해주기도 합니다. 제도와 범죄 사이의 추격전은 항상 범죄가 한 발 앞서 있습니다.
2022년 경찰청에 적발된 한 보이스피싱 조직은 2,000대가 넘는 불법 개통폰을 확보해 범죄에 사용했습니다. 피해자에게 전화를 걸고, 협박·유인·송금을 지시하는 데 쓰인 번호는 하루에도 수십 번 바뀌었습니다. 피해자는 “같은 경찰청 직원이 계속 전화하는 줄 알았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다른 대포폰을 쓴 다른 범죄자였습니다. 휴대폰이 범죄자들에게는 ‘탈의실의 옷’처럼 갈아입는 가면이 된 셈입니다.
우리가 휴대폰을 믿는 이유는 그것이 곧 나를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범죄자 손에 들어간 순간, 그 휴대폰은 거짓 신분과 가짜 신뢰를 만들어내는 무기가 됩니다. 불법 개통폰 문제를 뿌리 뽑지 않는 한, 보이스피싱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휴대폰은 단순한 통신 수단이 아니라, 사기의 첫 포문을 여는 범죄의 열쇠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4.2 대포통장 생태계 ― “돈의 그림자를 따라가는 길”
보이스피싱이나 각종 금융사기의 마지막 종착지는 돈입니다. 범죄자들은 피해자가 송금한 돈을 재빨리 빼돌려야 하고, 그 과정에서 대포통장은 필수 도구로 쓰입니다. 대포통장은 단순한 통장이 아니라, 돈의 흔적을 지우는 그림자입니다.
대포통장은 명의는 존재하지만, 실제 사용자는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서류상으로는 평범한 예금계좌처럼 보이지만, 돈이 입금되면 곧바로 인출되거나 다른 계좌로 분산 송금됩니다. 경찰이 추적할 때는 “피해자 돈이 ○○씨 통장으로 들어갔다”는 사실만 남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씨는 통장을 10만 원에 팔아넘겼을 뿐, 돈은 이미 해외로 빠져나간 뒤입니다.
경제적 취약층 포섭
“신용 불량자도 OK, 통장 하나에 20만 원 현금 지급” 같은 광고가 지하철역이나 온라인 커뮤니티에 뿌려집니다. 생활이 급한 이들은 손쉽게 통장을 넘기고, 그 대가는 결국 범죄에 악용됩니다.
중고 거래 위장
‘중고폰·노트북 삽니다’라는 가짜 거래를 통해 계좌번호를 받아내고, 송금 후 환불을 요구하면서 통장과 카드까지 탈취하는 방식도 있습니다.
아르바이트 위장
“고액 단기 아르바이트, 단순 송금 업무”라는 미끼로 사람들을 모집해, 실제로는 자기 명의 통장을 제공하게 만듭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사기 공범이 되는 것입니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범죄 조직은 통장 한 개를 10만 원~30만 원에 사들입니다. 이 통장은 단 하루 만에 수천만 원을 받아내는 ‘파이프’로 쓰이고, 바로 폐기됩니다. 즉, 통장 제공자는 푼돈을 받고 범죄 리스크를 떠안고, 조직은 막대한 이익을 챙기는 구조입니다.
2021년, 서울에서 검거된 한 보이스피싱 조직은 500여 개의 대포통장을 확보해 하루에도 수십 명의 피해자 돈을 흡수했습니다. 한 피해자는 1억 원을 송금했는데, 돈이 이동한 경로를 따라가 보니 3시간 만에 17개 계좌를 거쳐 이미 필리핀으로 빠져나가 있었습니다. 경찰 관계자는 “대포통장이 없는 보이스피싱은 총알 없는 총과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더 큰 문제는 통장 명의자입니다. 단순히 통장을 빌려줬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범죄에 연루된 공범으로 간주됩니다. 은행 거래가 제한되고, 신용이 무너지고, 심지어 형사 처벌까지 받을 수 있습니다. 이는 경제적 약자일수록 다시 더 깊은 빈곤으로 빠지는 악순환을 낳습니다.
대포통장은 단순히 금융 범죄의 수단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취약계층을 먹잇감으로 삼는 구조적 문제를 드러냅니다. 돈이 이동하는 길목마다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고, 그 그림자를 걷어내지 않는 한 우리는 계속 속수무책으로 돈을 잃게 됩니다.
“내 통장을 빌려주면 그 순간, 나는 범죄의 문을 열어주는 열쇠를 쥔 것과 같다.” 이 경고는 모든 은행 창구, 모든 온라인 커뮤니티에 새겨져야 할 문장입니다.
“돈은 경로를 숨기고, 국경을 가볍게 넘는다.”
환치기는 전통적으로 ‘돈을 다른 나라로 옮기는’ 오래된 방법입니다. 합법적 이유(해외 생활비 송금 등)로도 쓰이지만, 사기범들은 이 경로를 돈을 숨기고 세탁하는 도구로 활용합니다.
환치기는 은행을 통하지 않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약속으로 돈을 이동시키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A국의 B씨가 한국의 C씨에게 돈을 주면, 한국의 D 중개인이 A국의 D2에게 같은 액수(혹은 환율을 반영한 액수)를 지급합니다. 실제 돈은 국경을 건너지 않았지만, 당사자들 사이의 ‘신용 약속’으로 자금이 이동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 과정에서 대포통장, 불법 개통폰, 해외 브로커 등 공급망의 다른 요소들이 결합하면, 피해자의 돈은 흔적 없이 ‘바깥’으로 빠져나갑니다.
개인 브로커(환전상): 지역사회·커뮤니티 기반으로 신뢰를 쌓은 사람들.
현지 송금망: 소액씩 여러 계좌로 분산 송금 후 현지에서 현금 인도.
암호화폐 결합: 돈을 암호화폐로 바꾼 뒤 여러 지갑으로 분산 → 해외 거래소에서 현금화.
물물교환식 환치기: 상품·서비스 대가로 국제적 채무·크레딧을 조정하는 방식도 존재.
환치기는 전통적 ‘하왈라(hawala)’와 닮았습니다. 다만 현대 범죄는 디지털 도구(암호화폐, 다수 계좌, 자동화된 송금 스크립트 등)를 결합해 훨씬 빠르고 추적이 어렵습니다.
사기범의 목적은 돈의 흔적을 지우는 것입니다. 은행을 통해 큰 금액을 바로 해외로 보내면 즉시 의심 신호가 뜨지만, 환치기를 쓰면 표면상 합법적 소액거래처럼 보일 가능성이 큽니다. 또한 환치기는 다음의 장점을 제공합니다.
속도: 전송·분산이 빠르다.
분산: 작은 조각으로 쪼개 여러 계좌·지갑에 흩어놓아 추적을 어렵게 한다.
국경 회피: 각국의 규제·감시망을 회피할 수 있다.
현금화 용이: 현지에서 바로 현금으로 바꿀 수 있어 자금이 증발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결합되면, 피해자가 “내 돈이 어디로 갔지?”라고 묻는 순간 이미 돈은 다른 대륙에서 사라집니다.
암호화폐는 환치기의 촉매제가 되었습니다. 범죄자들은 피해금을 스테이블코인이나 비트코인으로 바꿔 여러 지갑에 분산(‘체인점프’)한 뒤, 여러 거래소에서 소액으로 환전해 출금합니다. 그 과정에서 믹서(분산·섞음 서비스)를 쓰면 추적 난이도는 급격히 올라갑니다. 이 때문에 ‘블록체인 탐지’ 기술이 발달했지만, 범죄자는 기술을 악용해 더 교묘한 회피 전략을 개발합니다.
환치기는 독립적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해외 합숙 콜센터가 전화를 걸어 피해를 유도하면, 대포통장과 불법 개통폰이 즉시 동원되고, 돈은 대포통장을 통해 모여 환치기로 넘어갑니다. 이 과정은 거의 공장화되어 있고, 각 단계의 플레이어들은 서로 연결되어 ‘사기 공급망’을 완성합니다.
한 피해자가 5천만 원을 송금하면 실전 흐름은 보통 다음과 같습니다.
피해자 → 대포통장(국내)
대포통장 → 분산 계좌(여러 명)
분산 계좌 → 암호화폐 거래소로 전환
암호화폐 → 해외 지갑으로 이체(체인점프)
해외 지갑 → 현지 현금상에게 인도(또는 국내로 역환치기)
이 모든 과정이 몇 시간에서 며칠 사이에 벌어집니다. 수사기관이 계좌를 동결했을 때는 이미 ‘돈이 떠났다’는 통보를 받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환치기는 국경을 가로지르므로 국제 협력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복잡합니다.
각국의 법 체계·수사 우선순위가 다르다.
금융규제·암호화폐 규제 수준 차이로 공조가 느려진다.
법적 절차(증거 확보·영장·추가 수사 요청 등)가 길고 복잡하다.
결국 환치기를 완전히 차단하려면, 다자간 정보공유·공조수사체계·플랫폼 규제·금융기관의 탐지 시스템이 함께 작동해야 합니다.
개인(피해 예방)
의심스러운 송금 요청은 절대 즉시 이행하지 않는다.
전화·메시지로 요구될 때는 두 채널(전화·공식 웹/앱)로 재확인한다.
중고거래·투자 등에서 ‘직접 대면’이나 에스크로 결제(안전결제)를 우선한다.
개인정보·계좌번호·인증서·OTP를 타인에게 절대 제공하지 않는다.
금융기관·플랫폼(탐지 강화)
이상입금 패턴(짧은 시간 다수 입금·순환 이체 등) 실시간 감지 룰 강화.
고객의 비정상 거래시 자동 알림·임시동결·추가 확인 프로세스 마련.
암호화폐 온·오프램프와의 연결 지점에서 KYC(신원확인)·AML(자금세탁방지) 엄격 적용.
정부·국제정책(구조적 대응)
주요 환치 루트에 대한 국제 공조 채널 상시화.
암호화폐 거래소·해외 결제 수단에 대한 규제 협의체 강화.
피해자 구제용 신속 자금 회수·정보공유 프로세스 마련.
소액 다회 입금 후 빠른 분산 출금.
알 수 없는 외국 지갑으로의 빈번한 송금.
중고거래·알바 명목의 ‘송금 대행’ 요청.
OTP·인증번호·계좌 비밀번호를 요청하는 전화·문자.
환치기는 돈의 ‘흔적을 지우는 기술’이자, 사기 공급망의 핵심 연결고리입니다. 개인은 ‘확인 습관’으로, 금융기관은 ‘감지 시스템’으로, 정부는 ‘국제 공조’로 이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혼자서는 어렵지만, 작은 변화—한 통의 의심, 한 번의 재확인, 한 건의 신고—이 쌓이면 거대한 다리를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사기는 결코 먼 곳에서 태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쓰는 앱, 우리가 빌린 통장, 우리가 믿었던 연결 속에서 자라납니다. 환치기를 이해하는 것은, 그 다리 위에 놓인 나사 하나하나를 빼내는 일과 같습니다. 끝이 멀어 보이지만, 한 나사씩 풀면 결국 구조는 무너집니다.
“낯선 도시의 작은 빌딩, 문을 열면 수십 명의 목소리가 합숙하며 같은 대본을 외운다.”
해외 합숙 콜센터는 더 이상 ‘전화를 거는 몇 명’의 소모적 배열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자본·기술이 결합한 산업적 시설—범죄의 공장이다.
해외 합숙 콜센터는 범죄 조직이 특정 국가(주로 규제가 느슨하거나 단속이 덜한 국가)에 모여 장기간 생활하면서 조직적으로 전화·메시지·온라인 사기를 수행하는 집단입니다. 이들은 현지에서 숙소·식사·교육을 제공받고, 정해진 스크립트와 분업 시스템에 따라 ‘생산’처럼 피해자를 만들어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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