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심리·대응·회복, 우리에게 필요한 한 권. 3장.
사기는 언제나 빈틈을 먹고 자란다. 그 빈틈은 개인의 욕망이나 두려움 속에도 있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제도와 문화라는 이름의 토양에 이미 스며 있다. 한국 사회가 만들어온 독특한 주거 제도, 돈을 맡기는 문화, 초연결된 인간관계, 그리고 손끝으로 흘러가는 모바일 송금의 속도는, 모두 편리와 신뢰를 약속한다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 그림자 속에서는 사기꾼이 자양분을 빨아들이고 있다.
전세라는 제도는 한때 “서민의 집 걱정을 덜어주는 지혜”로 칭송받았다. 그러나 이제는 깡통전세, 잠적한 집주인, 허위 등기라는 단어와 결합해 수십 년 모은 돈을 순식간에 빼앗아간다. 학원, 원룸, 상가, 심지어 아르바이트까지 보증금 문화는 안전을 보장하기보다 “한 번에 털어가는 출구”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한국의 초연결 사회. 단톡방과 오픈채팅방, 지인 추천의 문화는 신뢰를 강화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상 사기의 네트워크 유통망이 되기도 한다. “너도 들어갔으니 나도 안전하겠지”라는 착각이, 집단으로 빠져드는 심리적 진공을 만든다. 여기에 더해지는 것은 속도의 사회다. 카톡 알림음, 즉시 송금, ‘빨리빨리’의 문화. 돈은 10초 만에 오가지만, 사기를 밝혀내는 제도는 몇 달, 몇 년이 걸린다.
이 장은 바로 그 구조적 토양을 해부한다.
개인이 아무리 조심해도, 제도와 문화가 만들어낸 비옥한 땅 위에서는 새로운 사기 수법이 다시 자란다. 마치 습한 벽에서 곰팡이가 끝없이 돋아나듯.
따라서 우리는 이제 심리와 인지의 차원을 넘어, 사회 구조라는 토양을 들여다봐야 한다. 왜냐하면 사기꾼은 개인을 뛰어넘어 제도의 습기, 문화의 그림자 속에서 더 오래, 더 교묘히 자라기 때문이다.
3.1 전세 제도의 두 얼굴 ― 서민의 지혜에서 사기꾼의 무기로
전세는 한국에서만 존재하는 독특한 주거 제도다. 집을 사지 않고도 큰돈을 집주인에게 맡기면, 그 집에 몇 년간 살 수 있다. 세입자는 매달 월세를 내지 않아도 되니 안심이었고, 집주인은 그 목돈을 굴려 이익을 남길 수 있었으니 상호 윈윈 구조였다. 전세는 오랫동안 “서민의 집 걱정을 덜어주는 한국형 지혜”로 불렸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 제도의 또 다른 얼굴이 드러났다. 부동산 가격의 거품, 불안정한 임대 시장, 규제의 빈틈을 파고든 범죄적 상상력이 전세를 사기꾼의 천국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깡통 전세’라는 말은 이제 뉴스의 단골 메뉴가 되었고, 20년 모은 돈을 하루아침에 날린 청년과 신혼부부의 사례는 더 이상 특별하지 않다.
예를 들어 2023년 국토교통부 발표에 따르면, 전세 사기 피해액은 1조 원을 훌쩍 넘어섰다. 전국적으로 7천 건 이상의 피해가 공식 집계되었으나, 신고조차 되지 않은 사건까지 포함하면 실제 피해자는 훨씬 많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본다. 피해자는 대부분 사회 초년생, 신혼부부, 혹은 ‘내 집 마련의 첫 관문’에 들어선 사람들이었다. 꿈을 품고 전세 계약서에 도장을 찍던 순간은 설렘으로 가득했지만, 몇 달 뒤 그 서류가 종잇조각으로 변한다는 사실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대표적인 수법은 이렇다.
허위 등기: 빚으로 이미 잠식된 집을 ‘안전하다’고 속여 전세 계약을 맺는다.
명의 분산: 집을 가족이나 지인의 이름으로 돌려 피해 추적을 피한다.
이중 계약: 한 채의 집을 여러 명에게 동시에 전세를 준다.
이 모든 사기에는 ‘등기부등본을 떼어보면 알 수 있다’는 기본적인 점검조차 무력화시키는 허술한 제도적 관리가 뒷받침된다. 행정은 느리고, 사기꾼은 빠르다. 피해자가 법정에서 권리를 되찾기까지 수년이 걸리는 동안, 사기꾼은 이미 다른 이름으로, 다른 도시에서 새로운 계약을 맺는다.
무엇보다 이 문제의 본질은 단순한 ‘개인 부주의’가 아니다. 전세 제도 자체가 큰 목돈을 한 번에 맡기는 구조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사기꾼이 마음만 먹으면 단숨에 거액을 손에 넣을 수 있다. 즉, 제도의 뿌리에 이미 유혹의 씨앗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장은 묻는다.
“과연 전세는 더 이상 서민의 지혜가 아닌가? 아니면, 제도의 틀을 고쳐 다시 안전망으로 만들 수 있는가?”
한국 사회는 집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생활 영역에서 ‘보증금’이라는 제도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원룸과 상가 임대차는 물론, 학원 등록, 심지어 아르바이트까지 “보증금을 걸고 시작”하는 경우가 흔하다. 이는 본래 ‘신뢰’를 담보하기 위한 장치였다. 서로 낯선 사람이 거래를 하더라도 일정 금액을 맡겨 두면 ‘도중에 도망치지 않겠지’라는 심리적 안전망이 생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문화는 사기꾼에게 최적의 무기가 된다. 보증금은 미리 받아두는 돈이다. 상대방의 신뢰를 얻는 순간, 범죄자는 계약 첫날부터 거액을 손에 쥔다. 이후 연락을 끊거나, 시설을 방치하거나, 심지어 잠적하면 피해자는 되찾기조차 어렵다.
실제 판례를 보자. 2021년 서울의 한 어학원 원장은 수강생 수십 명에게 6개월 치 수업료와 보증금을 미리 받았다. 그러나 두 달 만에 학원 문을 닫고 사라졌다. 피해 학생들은 수백만 원씩을 날렸지만, 법적 절차를 밟는 동안 원장은 이미 다른 지역에서 새로운 간판을 달고 영업을 시작했다.
이 구조는 ‘선(先) 신뢰, 후(後) 검증’이라는 한국 특유의 속성에서 비롯된다. 빠르게 계약하고, 큰돈을 먼저 맡긴 뒤, 사후에 문제가 생기면 대응하는 방식. 즉, 예방보다 사후 수습이 제도에 내재해 있는 셈이다. 이 때문에 ‘보증금’이라는 단어가 더 이상 안심의 상징이 아니라, 오히려 “언제든 사기의 입구가 될 수 있는 문”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통계도 이를 뒷받침한다. 금융감독원 자료에 따르면 2022년 한 해만 임대차·보증금 관련 분쟁이 3만 건 이상 발생했다. 여기에는 부동산 임대뿐 아니라, 소규모 시설과 일자리에서의 사기성 사건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피해자 연령은 청년층부터 고령층까지 전방위였다.
보증금 문화는 결국 이렇게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신뢰를 담보하기 위해 만든 제도가, 왜 오히려 불신과 피해의 온상이 되었는가?”
이 장에서 우리는 보증금 제도의 구조적 허점과, 이를 악용하는 범죄자의 수법을 낱낱이 살펴본다. 나아가 ‘보증금 없는 거래’ 혹은 ‘공적 보증 시스템’과 같은 대안을 고민한다. 안전망이 덫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문화의 근본을 다시 점검해야 할 때다.
한국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초연결 사회다. 초고속 인터넷, 세계 최고 수준의 스마트폰 보급률, 메신저·SNS 의존도. 덕분에 우리는 단 몇 초 만에 소식을 주고받고, 거래를 성사시키며, 관계를 유지한다. 이 기술적 토대는 공동체를 지탱하는 든든한 다리 같지만, 동시에 사기꾼들에게는 사냥터 전체를 관통하는 지름길이 된다.
메신저 사기의 급증은 이 구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카카오톡·텔레그램·메신저에서 가족이나 지인을 사칭한 범죄가 2022년만 해도 5만 건 이상 보고되었다. “엄마, 급하게 돈이 필요해”라는 단 한 줄의 메시지가, 가족 간 신뢰를 정면으로 악용한다. 피해자는 수분 안에 송금을 끝내고 나서야 목소리 한 번 듣지 못한 채 속았음을 깨닫는다.
‘빨리, 더 빨리’가 미덕으로 자리 잡은 사회일수록 위험은 커진다. 연결망은 속도를 약속한다. 그러나 빠름은 검증의 시간을 앗아간다. 상대방이 누구인지, 메시지가 진짜인지, 송금 계좌가 안전한지 확인하는 절차는 ‘귀찮음’이라는 이유로 생략된다. 초연결은 신뢰를 촉진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검증 없는 신뢰, 즉 취약성을 확대한다.
사례는 생활 구석구석에서 발견된다.
중고거래 플랫폼에서는 ‘당일 직거래 불가, 택배만 가능’이라는 말에 속아 물건과 돈을 모두 잃는다.
온라인 구인구직 사이트에서는 “재택 알바”를 미끼로 개인정보와 계좌를 털린다.
SNS에서는 팔로워 수가 많은 계정을 사칭해 투자 권유를 받는다.
이 모든 범죄는 연결의 다리 위에서 일어난다. 연결망이 넓어질수록 ‘낯선 사람’과 접촉하는 빈도는 폭증한다. 그리고 한국 사회는 “연결 자체는 선(善)이다”라는 믿음을 깊이 내재하고 있다. 그 믿음이 범죄자들에게는 가장 값싼 미끼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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