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겸허히~ 키우라- (feat.삼신할매)
아이를 키우며 새로운 징크스가 생겼다.
기존의 내 인생은 예측할 수 있는 일들. 아니면 예측하기 위해 애를 쓰고 노력을 기를 쓰면 어찌어찌 노력에 대한 보상이 나오는 일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육아는 그렇지 않다. 예측이 불가능하다. 아니 예측을 한다고 해도 초보 엄마인 나의 예측은 거의 다 틀린다. 노력을 한다. 노력을 한다고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완벽에 완벽을 기해 노력을 더 가열차게 기울이면 좋지 않은 결과에 낙담하는 정도만 커질 뿐.
아무튼 육아는 내가 만났던 세상과 조금은 다른 성질임에 분명한데 이 징크스는 예측 불가능한 나의 육아 생활 중 유일하게 예측할 수 있는 일이 되어 나의 발목을 잡고 있다.
그 징크스는 바로 내 말의 반대로 모든 일이 흘러간다는 것이다.
‘좋은 일이 있어 안도하는 마음에 그 사실을 입으로 뱉으면 그 즉시 그 좋은 일이 없어져버린다.’
이 징크스가 나를 따라다니고 있다.
이건 마치 어느 주식 관련 방송에서 본 내용과 비슷하다.
“누가 내가 주식하는 걸 보는 것 같아. 내가 사면 기가 막히게 떨어져.”
“야 누구누구 저 주식 샀다. 떨어지게 하자 ~~~” 하는 게 아닐까? "
“또 내가 팔면 가격이 올라가. 야~~ 누구누구 저 주식 팔았다. 이제 올라도 된다~~~”
“누군가 내 주식을 보고 있는 게 틀림없어.”
망한 투자 이야기가 우스개소리로 떠돌며 매수 매도의 이 징크스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예측불가능한 주식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 같은 이 일이 나의 육아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100일쯤 무렵. 누군가 물었다.
“요즘 아기 잘 자?, 어때?” (나는 요즘 아기가 잘 자지 않으면 시무룩 해져서는 “안자. 정말 죽을 것 같아.” 이야기를 한다. 신기하게… 그러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
하지만 질문을 받았을 무렵 아이는 정말 통잠을 잘 자고 있었고 나는 그 사실에 너무 기뻐 안도하며 말했다.
“진짜 기특하게 우리 애기 통잠잤잖아. 이제 나 발좀 뻗고 자려나봐. 효녀야 효녀.”
이 이야기를 내뱉은 이후 참 신기하게 그 날부터 우리 애는 잠을 안 잤다. 효녀도 아니었다.
‘야 ~~ 쟤 지금 안도했다~ 이제 안 자게 당해봐라~’
7개월 무렵. 또 누군가 물었다.
“요즘 밥은 어때? 잘 먹지?”
밥을 잘 먹는 시기에 들어서서 너무 기쁜 마음에
“우리 애기 진짜 요즘 밥 잘 먹잖아.”
했더니 그 날부터 도무지 밥을 먹지 않고 씹던 음식들을 퉷퉤퉤 하며 뱉어내버린다.
‘야 ~~~쟤 지금 밥 잘먹는다고 했다~~~ 이제 안 먹게 당해봐라’ 하는 거 아닌가. 이쯤 되면 열받는다.
돌 무렵. 또 누군가 물었다.
“애기 아픈 곳은 없고? 돌치레한다고 보통 많이 아프던데?”
하는 말에
“우리 애는 모유 먹어서 잘 안 아픈가봐. 크게 앓은 적 없이 잘 크고 있어.”했다.
‘야~~ 쟤 애 안아프댄다~~ 이제 아픈 것 좀 당해봐라 ’
하… 또 당했다.
돌치레를 겪고 크게 아픈 아이를 보며 뒤늦게 깨달음이 왔다.
이외에도 요즘 애가 똥을 잘싼다고 칭찬했더니 그 다음엔 똥을 안싸고 변비에 걸렸고, 감기에 잘 안 걸리고 버틴다 싶어 안심했더니 바로 감기에 걸려 몇 주간 콧물을 달고 살았다.
아- 이것은 일종의 육아 룰이다.
안심, 안도하는 순간 모든 것은 반대의 결과를 맞게된다!! 지독한 징크스다
먹고 - 자고 - 싸는 일. 건강하게 놀고 살아가는 많은 일들이 나의 안도의 순간 이후 모두 무너졌다.
하… 이제는 순조롭게 잘 크고 있다고 대답을 하는 것이 두려워진다.
‘이렇게 말하면 다시 안 좋은 일이 일어날거야.
행운이 거둬질걸?’ 하며 기뻐하는 마음을 애써 거둔다. 자랑하고 싶더라도 질끈 눈 감으며 참아본다.
‘아직 안심하긴 일러! 아직 몰라! 더 봐야돼.’
‘오늘까지는 좋았어도 이제부터 어찌 될지 몰라.’ 등의 생각으로 겸허히 아이를 키워야 뒤탈이 없다.
안도하는 마음, 자랑하고싶거나 들추어내 떠벌리고 싶은 행동들을 다시 접고 접어 주머니 속에 꼬깃꼬깃 구겨 넣어본다. 속단하지 않고 겸손해야 한다는 것이 육아를 하며 내가 느낀 하나의 진리.
최첨단 21세기에 이 무슨 미신이냐. 이상한 샤머니즘이다, 참~ 말도 안된다 싶겠지만 엄마들 중 이런 생각을 나 혼자만 가지는 것은 아닌듯하다.
100일도 안 된 신생아를 키우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친구를 만나러 간 자리에서 내가 물었다.
“애기 어때? 요즘 잘 자?”
그 질문에 돌아온 대답이 어찌나 공감되던지.
“야 그 말에 잘 잔다고 대답하면 삼신할매가 들어서 그 때부터 안 잔다? 잘 안잔다고 해야 돼. 잘 안 자. 우리애 너~~~무 안 자.”
우리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 이상하게 삼신할매의 존재를 믿었다. 그리고 나는 그 존재의 특성에 대해 너무도 자연스럽게 설득당했다.
그렇다. 신생아의 잠은 진정 삼신할매의 축복이 있어야만 허락되는 것이다.
삼신할매한테 잘 보이려면 나대면 안되는 것이다!
정규 교육과정을 밟고 열심히 공부했는데 나는 보이지 않는 삼신할매의 존재에 기대어 아이를 키우고 있다…
이런 걸 보면 참으로 육아는 이성의 영역에만 매달려서 되는 일이 아니다. 예측하기도 불가능하고 노력으로 먹고 자고 싸고 노는 일이 원만히 해결되는 법도 없다.
어찌보면 나 아닌 다른 객체를 나의 의지로 어떻게 마음으로 짓주무르거나 잘 컨트롤해보겠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부조리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 아이의 엄마이지만 오롯이 그 아이가 될 수는 없다. 나는 온전히 아이의 생각과 마음, 상황을 100%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육아는 내가 행하는 어느 일보다도 속단할 수 없는 일이다.
신이 그 사실을 알게 하려고 내 징크스를 만든 것은 아닐지.
단호한 판단이나 생각이 손바닥 뒤집듯 쉽게 바뀌는 나의 육아. 그런 육아이므로 항상 겸허한 자세로 아이를 마주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조심하는 마음으로, 묵묵하게. 성실히 아이의 뒤에서 해야 될 일을 해 내며 기다려주는 것.
그것만이 육아의 열쇠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아이가 곱게 커서 이런 징크스를 신경쓰지 않고 마음껏 이야기를 내뱉을 수 있는 그 날이 어서 오기를 바라며. 징크스에 전전긍긍하는 법 없이 강철멘탈로 무장한 강인한 엄마가 되는 그 날도 어서 오기를 바라며.
오늘도 삼신할매에게 우리 아이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고 건강하게 해달라고 빌어보며 육퇴를 향해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