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누구도 살 수 없는 1급수의 세계

자기애성 성격장애

by 성장노트

#둘째의 출산, 그리고 어설픈 봉합

며느리로서 제명을 당하고 시작된 1년여의 단절. 그 시간은 남편과 나에게 전혀 다른 의미로 흘렀다. 나는 이혼을 종용하는 부모 대신 내 손을 잡아준 남편에 대한 고마움과 애틋함으로 하루하루를 버텼지만, 남편의 마음속엔 이름 모를 부채감과 불안이 자라나고 있었다.


갈등은 둘째 출산을 2주 앞둔 어느 날 밤 갑작스럽게 터져 나왔다. 둘째 소식까지 알리지 않으면 정말 부모님과 영영 끝일 것 같아 전화드렸고, 내일 첫째 데리고 찾아뵙기로 했다는 남편의 일방적인 통보. 상의가 아니었다. 그러더니 다음날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아이를 빼앗아가듯 데리고 본가로 갔다.


배신감과 충격에 휩싸여 미친 듯이 집안일을 하며 마음을 추스르려 했지만, 몸이 버티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진통과 함께 나는 조산을 했다. 경황없는 와중에 첫째 아이는 시부모님께 맡겨졌고, 비상식에 대한 사과 한마디 없이 긴박한 순간에 아이를 봐주신 감사한 부모님이라는 프레임으로 과거는 얼렁뚱땅 덮여버렸다.






#가랑비에 젖듯 시작된 남편의 변심

그날 이후, 나를 제외하고 아이를 데리고 시댁을 왕래하던 남편은 서서히 변해갔다. 시댁에서 쏟아지는 나에 대한 모함과 비난에 무방비로 노출된 탓이었다. 1년이라는 시간은 남편의 기억조차 조작해 놓았다.


시어머니는 불편하더라도 할 말은 하는 당당한 여성, 엄격하긴 하지만 예의와 도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으로 미화되었다. 반면 나는 예의와 도리를 모르는 차가운 사람, 완벽하지 못하고 매사에 대충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점점 가부장적인 잣대로 나를 평가하며 원망의 눈빛을 보내기 시작한 남편.


그런 남편을 다시 내 곁으로 불러온 것은 역설적이게도 시부모님의 선 넘는 행동이었다. 아이 앞에서 내 흉을 서슴없이 보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던 순간, 남편은 비로소 개안했다고 한다. "나에게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것 같아요. 제발 도와주세요." 아이를 안고 달려온 남편의 절박한 한마디에 우리는 상담실 문을 두드렸다.






#1급수, 아무 생명체도 살 수 없는 물

우리는 전략을 짰다. 전문가의 권위를 중시하는 시어머니의 성향을 이용해, "우리 부부의 문제에 도움을 달라"며 시어머니를 상담실로 초대했다. 시어머니는 나에 대한 증언을 쏟아낼 기회라 여기며 당당히 앉으셨다.


두 번의 상담을 통해 시어머니의 사고방식과 내면의 방어기제가 파헤쳐졌다. 상담사는 시어머니가 무뚝뚝한 남편(시아버님)과 결혼생활에서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형성된, 호두껍질처럼 단단한 자기애성 성격장애(NPD)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진단을 내렸다.


상담사가 시어머니께 "어머님은 1급수 같으신 분이세요"라고 말했다. 처음에 시어머니는 그 말을 극찬으로 오해하며 "어머, 과찬이세요"라며 기뻐하셨다. 하지만 이어진 상담사의 설명을 듣고 크게 당황하셨다고 한다.


"어머님, 이건 칭찬이 아니에요.

1급수는 너무 투명해서 어떤 생명체도 살지 못해요.

지금처럼 아무도 다가가기 어려운 곳의 센터가 아니라, 앞으로는 모두가 찾는 곳의 센터가 되셔야죠."


시어머니는 상담사가 본인의 편이 아님을 직감하자 입을 닫으셨다.

그리고 며칠 후, 남편을 불러 최종 선고를 내리셨다.

"이제 우리 보지 말자.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생각하자."


손주들이 보고 싶지 않겠느냐는 남편의 물음에도 시어머니의 대답은 차가웠다.

"응, 보고 싶지 않아."






그날 이후 다시 연은 끊겼다. 남편은 마치 헤어진 연인을 잊지 못하는 사람처럼 괴로워했다. 술에 취해 전화를 걸어보기도 하고, 아이를 데리고 몰래 집 앞을 찾아가거나 선물을 보내보기도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침묵뿐이었다.


호두껍질은 깨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단단히 닫혀버렸다. 남편은 닫힌 문 앞에 그렇게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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