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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업로드) 영원한 것은 없다

나의 브런치 첫 번째 글이 사라지다

by 장윤서

오랜만에 친구에게 브런치 링크를 보내주며 내 글을 다시 읽어보았다. 그때는 지나쳤던 오탈자가 눈에 띄었고 수정버튼을 누른다는 것이, 그만 삭제버튼을 눌러버렸다. 브런치는 친절하게도 '정말로 삭제하시겠습니까' 문구를 보여줬지만 바보같이 제대로 읽지 않고 '예'를 눌러, 그렇게 나의 첫 브런치 글이 삭제되는 아찔한 경험을 방금 하고 왔다.


그나마 다행인 건, 구글독스에 글을 저장해놓았고 덕분에 나를 브런치 작가로 승인받게 해준,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했던 나의 첫 글을 되살릴 수 있었다. 본문은 아래와 같다.




영원히 너만 사랑할게, 우리 우정 영원히 등 사람들은 영원하자는 말을 쉽게 쓰곤 한다. 그런데 인생이란 너무도 가변적이라서 뱉은 약속을, 영원할 것 같던 굳건한 관계를 지킬 수 없게 되기도 한다.


최근에 프랑스에서 놀러 온 친구와 찜질방을 갔다. 니코는 파리 여행을 하던 도중에 카우치서핑을 통해 만났다. 카우치서핑은 현지 호스트와 여행객 교류 플랫폼으로 호스트가 자신의 집에 돈을 받지 않고 무료로 여행객을 재워준다는 점에서 나같이 예산이 빠듯한 여행자에게는 아주 유용하다. 호스트가 투어 가이드를 해주기도 하고 로컬들이 가는 식당과 놀거리에 데려가기도 하고 그들의 친구를 만나기도 한다는 점에서 평범한 관광객은 할 수 없는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사람들과의 교류와 특별한 경험을 중시하는 나에게 꼭 맞는 플랫폼이었다.


2개월 간의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비행기를 타러 파리에 갔다. 파리에는 이전에 몇 번 가보기도 하였고 여러 도시들을 들르다 보니 한 달 전에 예매해 놓은 인천행 비행기를 타려면 파리에서 하루밖에 쓸 수 없게 되었다. 니코는 파리의 카우치서핑 호스트였고 퇴근 후 함께 저녁을 먹고 전기자전거를 타며 밤의 파리를 관광했던 인연이 있는 친구이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와 학교를 다녔고 니코는 계획했던 1년 동안의 세계여행을 하며 한국을 방문하였다.




파리에서 만난 지 3개월 만에 니코와 서울에서 재회하였다. 이전에도 한국을 몇 번이나 방문한 적이 있는 니코는 찜질방을 좋아한다며 날이 추운 11월에 어떠냐며 먼저 찜질방을 제안하였다. 그렇게 구운 계란도 까먹고 감자와 고구마도 구워 먹으며 찜질방을 누렸고 나오는 길에 외국인 손님이 흔치 않았던 이유인지 아니면 영업종료 시간까지 남아있던 우리가 인상적이었는지 혹은 그 둘 다인지 사장님이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시며, 정확하게는 니코에게 관심을 보이시며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찜질방은 어땠는지 이런저런 질문을 하셨다. 그리고 마지막 인사로 ‘다음에 또 둘이 같이 와요’라고 하셨다.


나는 ‘네’라고 답을 했지만 알고 있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걸. 니코는 세계여행 중에 한국을 방문한 것이고 서울에는 길어야 일주일 정도 머문다. 서울에서 나와의 시간도 이날 저녁 하루가 다였다. 나는 다른 친구들과 이 찜질방을 다시 올 수 있겠지만 니코가 여기를 다시 오기는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다음에 또 둘이 같이 오라는 말에 네라고 답하면서도 나는 지키지 못할 말임을 알고 있었다.


약속까지는 아니더라고 단순한 인사치레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그때의 그 감정은 오묘했다. 다시는 둘이 함께 오지 못할 곳이라고 생각하니 슬프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찜질방에서의 경험이 좋았기 때문에 사장님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복합적인 감정이 들었다. 마치 여행하면서 정들었던 곳을 대부분은 많은 기억과 추억이 깃든 곳을 떠날 때의 기분이었다.




니코와의 사이가 멀어진 것도, 그 찜질방이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장소인 것도 아니라 그저 인생은 흘러가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새로운 상황과 사람들이 주어지고 흐르는 물과 같이 나는 그저 새로운 인연들을 만나는 것뿐이다. 영원할 것 같던 사랑도 우정도 간절히 부여잡고 있지 않는 이상 흐르는 물과 함께 떠내려가기 쉽다.


흐르는 물은 나이기도 하면서 내가 소중히 여긴 사람, 존재, 가치관, 능력, 열정이기도 하다. 그 물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나이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내가 아닌 것인지 인식하기 쉽지 않다. 물처럼 칼 같이 경계를 그어 나눌 수 없는 것일지도. 사람은 변한다. 강물이 흐르며 돌을 깎아내고 부수어 지형을 변화시키는 것처럼 내가 주변에 영향을 주며 때로는 그 영향이 더 큰 사회에 닿기를 바라든 바라지 않든 사람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주변과 부딪히며 물의 특성이 바뀌기도 한다. 환경에 따라 산도가 변하기도 하고 바다로 유입되기 시작하면 염분이 높아지고 공장수와 섞여 오염이 되기도 한다. 나도 그렇다. 나라는 존재가 불명확하여 나라는 사람의 정의가 너무도 연약하기 때문에 이것저것 섞일 수 있는, 모호한 존재인 것이다. 강물은 바다로 흘러가게 되면 강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인 하구를 지나 바닷물이 된다. ‘강물’이라는 존재에서 ‘바닷물’이 된 것이다. 바닷물이 된 강물은 강물의 특성을 모두 잃어버린다. 오직 바닷물의 특성을 가지고 그것이 이전에 강물이었는지 바닷물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현재만이 중요할 뿐이다.




그런데, 바닷물의 다음 단계는 증발이다. 햇빛에 의해 따뜻해진 바닷물은 수증기가 되어 증발하고 구름을 형성한다. 구름은 비를 내리고 빗물은 땅에 스며들거나 강물을 형성한다. 강물은 다시 강물이 되었다. 나는 다시 나일 수 있는 것일까. 삶의 과정에서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지에 따라 나의 존재와 의미가 결정된다고 믿고 살아왔는데 결국에 돌아오는 것은 나 자신으로의 회귀인 것일까.


‘강물’, ‘바닷물’, ‘수증기’, ‘구름’, ‘비’ 등 우리는 살면서 많은 이름과 호칭, 직업, 명사로 불린다. ‘딸’, ‘학생’, ‘친구’, ‘연인’, ‘학급 회장’, ‘고객’, ‘한국인’, ‘MZ’ 때로는 ‘친하게 지내고 싶지는 않는 사람’, ‘공격적인 사람’, ‘고집 있는 사람’ 때로는 ‘같이 있고 싶은 사람’, ‘용기 있는 사람’, ‘멋진 사람’으로 지칭된다. 나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 모든 것이 다 나인 것 같으면서 어느 하나도 내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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