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이라는 여백
커다란 상자 하나를 가득 채운 편지와 엽서들, 그리고 조그맣게 접힌 다양한 모양의 메모지들. 손편지의 감성에 흠뻑 빠져 지내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이야 ‘휴대폰’이라는 매개체 하나만 있으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어떤 소통이든 가능한 ‘스마트한’ 시대를 살고 있지만 내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때, 그러니까 ‘뉴 밀레니엄 시대’를 코앞에 둔 시기까지만 해도 친구들 사이에서 주로 사용된 소통의 도구는 손으로 쓴 편지였다. 집 전화 외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고리가 될 만한 특별한 무엇이 없었기에, 편지를 쓴다는 것은 그저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은 아주 가끔 특별한 날 카드를 쓰는 것 정도가 전부이긴 하지만, 그때 느꼈던 아날로그적 감성은 여전히 몽글몽글한 옛 추억으로 남아 있다.
등하교 시간, 혹은 저녁 자율학습 시간 전 쉬는 시간이면 마치 참새가 방앗간을 찾듯 내 발은 자연스레 학교 앞 팬시점을 향한다. 팬시점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벌써 내 마음은 기대감에 부풀어 있다. 가게 안 좁은 통로를 따라 들어가면 한쪽 구석에 자리 잡은 편지지와 엽서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진열대에 가지런히 정리된 편지지들을 하나하나 눈으로 훑어본다. 그러다 눈에 들어오는 몇 개를 골라 두 손에 집어 든다. 편지지와 편지 봉투가 몇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종이가 너무 두껍거나 얇진 않은지, 펜으로 글자를 썼을 때 어떤 느낌을 주는 재질의 종이인지 등 요리조리 살펴보고 꼼꼼히 따져본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색상과 디자인이다. 따스한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은은한 분위기의 디자인도 좋고,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아기자기한 느낌의 편지지도 마음에 든다. 어느 것을 골라야 할지 모르는 선택의 기로에 설 때면, 편지 받을 ‘그 사람’을 가만히 떠올려 본다. 어떤 디자인을 더 좋아할지, 그 사람에게 어떤 분위기의 편지지가 어울릴지 등을 고민하다 보면 선택은 그리 어렵지 않다.
늦은 밤, 고르고 고른 편지지를 꺼내어 책상 앞에 올려 본다. 그윽한 스탠드 조명 아래 조용히 펜을 든다. 라디오를 타고 흐르는 잔잔한 노랫소리가 밤의 감성을 더해 준다. 무언가 대단한 의식을 앞둔 사람처럼 크게 숨을 내쉬어 본다. 무슨 얘기든 다 쏟아낼 듯이 들떴던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첫 마디를 떼지 못한 내 손은 종이 위에서 한참을 머뭇거린다. 텅 빈 종이 한 장은 내 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린다. ‘무슨 말을 어떻게 시작할까?’ 친구에게 전하고 싶은 나의 이야기들을 머릿속에 천천히 그려본다. 그리고 펜을 잡은 손으로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가며 내 마음을 담기 시작한다. 행여 글씨가 틀리지 않을까, 글자 모양이 비뚤어지지 않을까, 편지를 쓰는 내내 나의 온 신경은 펜 끝에 집중된다. 그렇게 정성스레 쓴 글자들이 종이 위에 차곡차곡 쌓여 간다. 내 안에 가득 차 있던 이야기들로 하나둘 채워진다.
밤이 깊어간다. 그칠 줄 모르는 나의 이야기도 소리없이 고요히 흘러간다. 편지를 쓰고 있는 내내 나의 머릿속은 한 사람으로 가득 차 있다. 나의 이야기를 쓰고 있는 그 순간에도 내 마음은 단 한 사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렇게 완성된 편지를 두 손으로 펼쳐 든다. 마치 내가 받은 편지를 읽는 것 같은 설레는 마음으로 편지를 읽어 나간다. 무언가 더 채우고 싶은 아쉬움이 느껴질 때면, 편지지 한쪽 구석에 내가 좋아하는 짧은 시 한 편을 적어 넣는다. 이만하면 된 것 같다. 단 한 사람의 독자를 생각하며 내 마음에 길을 내는 시간,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하는 머뭇거림조차도 행복한 여백의 선물로 채워지는 시간, 내가 너에게 쓰고 있는 바로 그 순간이다.
밤새 쓴 편지를 곱게 접어 봉투에 넣어 풀로 잘 붙인다. 주소를 쓰고 우표를 붙이고 나면 이제 편지를 부치는 일만 남는다. 정성을 다해 준비한 편지를 가슴에 안고 빨간 우체통 앞에 서는 순간, 손끝으로 작은 떨림이 전해온다. 이제 곧 내 손을 떠날 것이라 생각하니 설렘과 긴장 속에 마음이 두근거린다. 우체통 좁은 구멍 속으로 조심스레 편지를 밀어 넣는다. 편지가 ‘툭’하고 소리를 내며 우체통 속에 떨어진다. 두근대던 마음도 그제야 조용히 사그라든다. 이제 정말 가서 닿을 일만 남았다. 뒤돌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가 띄운 편지가 친구에게 잘 도착했으면 하는 바람과 친구로부터 받게 될 답장에 대한 기대감이 내 마음을 가득 채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