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한 줄기 빛, 그 속에 담긴 인간다움
몇 년 전 TV에서 방영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라는 드라마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있는 천재 변호사의 이야기를 다룬 다양한 에피소드로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특히 주인공 우영우가 사회인으로서 성장해 가는 모습과 함께하는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 그리고 흥미로운 사건 해결 과정이 보는 이들로 하여금 공감과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드라마 속에서 우영우가 남긴 많은 대사들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한 마디가 있다. 주인공 우영우가 동료 변호사의 별명을 지어 부르자, 함께 있던 친구 최수연은 자신에게도 어울리는 별명을 지어 달라며 조른다. ‘최강 동안’이나 ‘최고 미녀’라는 별명을 기대하고 있던 최수연에게, 우영우는 이렇게 말해준다.
“너는, 봄날의 햇살 같아.” 그리고 덧붙여 이야기해 준다.
“로스쿨 다닐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어. 너는 나한테 강의실의 위치와 휴강 정보와 바뀐 시험 범위를 알려주고 동기들이 날 놀리거나 속이거나 따돌리지 못하게 하려고 노력해. 지금도 너는 내 물병을 열어주고 다음에 구내식당에 또 김밥이 나오면 나한테 알려주겠다고 해. 너는 밝고 따뜻하고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야. 봄날의 햇살 최수연이야.”
그 말을 듣는 순간 친구 최수연의 눈시울이 붉어졌고, 밀려오는 뭉클함에 나도 덩달아 코끝이 찡해졌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우영우는 알고 있었다. 자폐라는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친구를 배려하고, 사소하지만 꼭 필요한 도움을 주고자 했던 최수연의 착하고 따뜻한 마음을 이미 헤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친구를 생각할 때 자연스럽게 떠오른 이미지는 ‘봄날의 햇살’이었다.
햇살은 ‘해에서 나오는 빛의 줄기’라는 ‘햇빛’의 의미와, ‘해에서 나오는 빛의 기운’이라는 ‘햇볕’의 의미를 모두 담고 있다. 그래서 햇살은 빛으로 다가올 수도 있고, 따뜻한 온기로 찾아올 때도 있다. 그 빛과 온기는 어떤 순간에 느낄 수 있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에 정반대 되는 상황을 경험해 본 사람만이 인지할 수 있는 감각 또는 감정이 아닐까. 캄캄한 어둠을 뚫고 들어오는 한 줄기 빛이 어두워진 눈과 마음을 밝혀주고, 차디찬 겨울을 지난 후에 맞이하는 봄의 따스한 기운이 더욱 감사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말이다.
아마 드라마 속 우영우 또한 그러했을 것이다. 아무리 천재성을 지닌 영리한 변호사라 하더라도,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자폐’라는 이름 속에 갇혀 있었다. 사회가 정해 놓은 ‘보통의’ 사람, ‘평범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테두리 밖’의 사람으로서 감당해야 하는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그러하기에 ‘햇살’과 같은 친구의 존재는 그녀에게 더욱 소중하고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속에는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이 존재한다. 육체적, 지적으로 장애를 안고 사는 사람들, 부모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자라가는 아이들, 빈곤과 차별 등으로 고통받는 많은 이들이 저마다 처해 있는 어둠과 혹독한 추위 속에서 간신히 버텨내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그들과 전혀 무관한 사람일까?
현재 내가 한국어 강사로 일하고 있는 한국어교육원에는 매년 수백 명의 유학생이 한국어를 공부하기 위해 한국으로 들어온다. 작년 한 해 동안 한국으로 유학 온 학생들의 수만 해도 전국에 2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외국인 노동자들과 결혼 이주민들 등, 한국이라는 나라를 제2의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외국인들의 수 또한 매년 증가하고 있다. 여러 민족과 인종, 문화가 공존하는 ‘다문화 사회’라는 말은 더 이상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님이 분명하다.
한국어교육원은 1년 동안 4학기제로 수업이 진행된다. 따라서 나에게는 1년 동안 새로운 학생들을 만날 수 있는 네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 학생과의 원만한 유대를 유지하되 학생의 개인사에는 깊이 개입하지 않는 것이 교육원 내의 조화와 균형을 위한 교사의 의무이자 자질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꼭 선생님에게 도움을 요청하라고 학생들에게 이야기해 주곤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와 같은 문제가 자주 발생하는 것은 아니지만,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생활하는 학생들에게 작게나마 ‘믿을 구석’ 하나 정도는 마련해주고 싶은 마음에서이다.
가령 집주인에게 전화해야 할 일이 있지만 서툰 한국어 실력 때문에 망설여질 때 대신 전화를 걸어준다거나, 바꾼 현관문 비밀번호가 기억나지 않아 당황스러워하는 학생을 대신해 수리기사를 부르고 집주인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기도 했었다. 하루는 눈 주변에 원인 모를 알레르기 반응 때문에 눈이 퉁퉁 부어서 등교한 학생을 그냥 놔둘 수가 없어서, 수업 후에 병원에 데리고 가서 증상을 설명해 주고 집에 데려다준 적도 있었다.
내가 베푼 친절은 크고 대단한 무엇이 아니었다. 모두 일상 속에서 경험하는 사소한 일들에 불과하다. 그저 타국에서의 생활이 조금은 편안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된 작은 배려일 뿐이었다. 학생들이 나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기도 했지만, 사실 그러한 일들을 통해 만족감과 뿌듯함을 느끼는 것은 오히려 나였다. ‘공헌감이 곧 행복이다’라는 심리학자 아들러의 말처럼,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 안에 채워지는 기쁨과 행복감이 컸기 때문이다.
도움을 주고받는 삶이 왜 행복감을 가져다주는 것일까? 그 행위를 통해 나의 ‘인간다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인간답다는 것. ‘-답다’는 것은 그 이름을 가질 ‘자격 있음’을 뜻한다. ‘아이답다’, ‘어른답다’, ‘선생님답다’ 등의 말 속에는 그에 걸맞게 기대되는 역할이나 이미지가 담겨 있다. 천진난만하고 순진한 아이의 모습을 볼 때 ‘아이답다’라고 느끼며, 학생들을 사랑으로 잘 가르치고 지도하는 모습에서 ‘선생님다운’ 면모를 보게 된다. 따라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품격을 지니고 살아갈 때, 우리는 그런 사람을 ‘인간답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 ‘기대어’ 사는 존재, 바로 인간이다. 혼자만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또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그러하기에 ‘인간다움’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인간의 속성인 것이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마음에 서 보는 것,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존중하며 그의 처지를 공감하는 것. 드라마 속 우영우는 친구 최수연에게서 그런 배려 깊은 마음을, 그녀의 인간다움을 경험했던 것이다.
너와 나는 보이지 않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 ‘네가 있어 내가 있다’라는 타자에 대한 인정과 수용, 내가 소중한 만큼 타인을 가치 있게 여길 줄 아는 올바른 유대감이 있을 때, 우리는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다. 불안정하고 위태로울 수밖에 없는 환경 속에서도 안정감을 느낄 수 있게 하는 힘은, 그 연결성을 놓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낯선 어둠을 뚫고 비춰오는 한 줄기의 밝은 빛, 얼어붙어 있는 마음을 스르르 녹여 줄 수 있는 한 줌의 따스함. 그 인간다움을 계속해서 살아내고 싶다. 누군가에게 나도 그런 ‘봄날의 햇살‘이 되어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