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동안 한 번은
좁은 닭장 안에서 꼼짝없이 알만 낳아야 하는 암탉이 있었다. 그 속에서는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도, 날개를 푸덕거릴 수도, 자신이 낳은 알을 품어 볼 수조차 없었다. 발끝으로 만져 볼 수도 없는 알이 바구니에 담겨 떠나는 것을 볼 때면, 알을 낳을 때 느꼈던 뿌듯한 기분은 곧 슬픔이 되어 버리곤 했다. 매일 반복되는 허탈함에 암탉은 점점 지쳐갔다. 하지만 암탉에게는 남모르는 소망이 하나 있었다. 알을 품어서 병아리의 탄생을 보는 것, 암탉은 이 소망을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다.
‘잎사귀가 또 꽃을 낳았구나!’
바람과 햇빛을 한껏 받아들이고, 떨어진 뒤에는 썩어서 거름이 되는 잎사귀. 그래서 결국 향기로운 꽃을 피워내는 잎사귀를 보며 암탉은 소망했다. 자신도 아카시아의 그 잎사귀처럼 뭔가를 해내는 존재가 되고 싶다고.
황선미 작가의 <마당을 나온 암탉>에 등장하는 주인공 암탉, ‘잎싹’의 이야기다. ‘잎싹’이라는 이름은 자신이 그토록 부러워하던 아카시아의 ‘잎사귀’를 보며 스스로에게 지어 준 이름이다. 비록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이름이었지만, 잎싹은 그 이름에 담긴 간절한 소망을 품고 당당하게 살아간다.
‘무엇이 되는 것’이 꿈을 이루는 것이라 여기며 살던 때가 있었다. 교실이라는 답답한 공간 속에서 온종일 책상 앞에서 씨름해야 했던 고등학교 시절, ‘대학교만 가면, 어른만 되면’이라는 막연한 기대와 환상을 희망처럼 붙들고 시간을 보냈었다. 하지만 대학생이 된 나에게 해방처럼 주어진 그 자유가, 나를 ‘자유롭게’ 해 주지는 못했다. ‘돈은 주조된 자유다’라 했던 러시아 작가 도스토옙스키의 말처럼, 돈이 없는 지방 학생의 서울살이는 자유롭다기보다 고달픔에 가까웠다.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밤늦은 시간까지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고, 반지하, 옥탑방, 고시원을 전전하며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선생님이 되겠다는 마음으로 임용 고시를 준비했지만, 막상 시험에 떨어지고 나니 더 이상 공부가 하고 싶지 않았다. ‘고시생’이라는 이름에서 하루빨리 벗어나 ‘직장인’이라는 이름을 갖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돈을 벌고 싶었다. 직장인, 아내, 엄마, 그리고 선생님. 취업과 결혼, 출산과 육아 등의 과정을 거치며 나는 계속해서 ‘무엇’이 되어 왔다. 내가 원하는 이름을 얻었을 때, 내가 바라던 일이 이루어졌을 때 만족과 행복감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의 기쁨과 감격은 내 곁에 그리 오래 머물지 않았다. 잠시 마음에 차오르는 듯하다가도 어느새 익숙해지고 무뎌지곤 했다. 무엇이 되었다고 해서, 내 진정한 꿈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일상의 관성에 이끌려 살아오던 어느 날, 우연한 기회로 독서모임을 만나게 되었다. 학창 시절에도 잘 읽지 않던 고전문학을 읽으며, 소설을 읽는 즐거움을 뒤늦게 맛보기 시작했다. 물론 ‘즐거움’이란 말속에는 쉽고 달콤한 의미만 담겨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내하며 홀로 싸워내듯 읽어내야 하는 시간이 훨씬 더 많았다. 그럼에도 작품 속으로 뛰어들고 파고드는 작업은 내게 참으로 새롭고도 ‘즐거운’ 일이었다. 이전엔 그저 ‘허구의 세계’라며 덮어 두었던 이야기들 속에서 ‘진짜’ 인간의 삶을 보기 시작했다. 작가의 시선을 통해 표현된 인물들의 말과 행동, 생각 속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인생과 내면이 읽히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책과 점점 가까워져 갔고, 나는 조금씩 ‘읽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읽고 있으면 자연스레 쓰고 싶어졌다. 작가가 남긴 이야기의 여운을 간직하고 싶어 글을 썼고, 나를 멈추게 만든 한 줄의 문장을 버릴 수가 없어 알뜰히 기록으로 남겼다. 글은 그렇게 ‘감동’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흔들었고, 때론 내 삶을 일깨우는 ’도끼’가 되어 딱딱하게 굳어 있던 내 생각의 바위를 깨뜨리기도 했다. 글과 나, 나와 글 사이에 놓인 보이지 않는 연결의 끈을 따라 끊임없이 소통하며 나 자신을 만났고, 세상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러한 경험들이 내 안에 쌓여 갈수록 ‘쓰는 일’에 대한 나의 갈망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나 아닌 다른 누군가의 마음에 가닿을 수 있는 ‘울림’이 있는 글, 흔들고 일깨우는 글을 쓰고 싶었다. 아카시아 잎사귀가 꽃을 피우고 거름이 되듯이, 나도 누군가의 삶에 꽃을 피우고 거름이 되어 주는 그 위대한 일에 뛰어들고 싶었다.
‘잘’ 쓰고 싶었다. 그 마음은 지금도 여전하다. 하지만 세상의 어떤 일도 노력 없이 거저 주어지는 것은 없다. 의미와 가치가 담긴 일일수록 더욱 그렇다. ‘잘 살면 잘 쓰게 된다’라는 어느 작가의 말처럼 살아내는 것 이상을 써낼 수 없는 것, 내가 넓어지고 깊어지는 만큼, 딱 그만큼 나아가고 성장하는 것이 바로 ‘글’이었다. 잘 써보겠다고 아무리 욕심을 내 보아도 ‘나’라는 사람 그 이상을 보여줄 수가 없다. 나의 글이 곧 나이다. 나는 다시 나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나는 왜 쓰고 싶은가? 왜 쓰려고 하는가? 그에 대한 답 또한 마찬가지이다. 잘 살고 싶어서. 잘 살아내고 싶기 때문이다.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사는 것이 후회 없는 삶일까? 인생의 근원적 질문 앞에 나는 어떤 답을 준비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살아가는 동안 한 번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로 유명한 근대 철학자 데카르트가 자주 썼다는 이 말이, 요 며칠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내가 살아가면서 꼭 한 번은 해 보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된다. 단지 ‘작가가 되는 것’일까? 글 잘 쓰는 유명한 작가들을 보면 부러운 마음이 드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 스쳐 가는 표면적 이상일 뿐, 궁극적으로 내가 원하는 바는 아니다. 내가 정말 꿈꾸는 것은, 평생 ‘쓰는 사람’이 되는 것, 끝까지 ‘쓰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글을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나를 발견하고 세상을 알아가고 싶다. ‘누구처럼’이 아닌 오직 ‘나’로서의 고유성을 지닌 한 사람으로, 나의 길을 가고 싶다. 세월이 갈수록 글 속에서 깊이와 넓이가 느껴지는 삶, 글을 통해 자기만의 꽃을 피워내고 향기를 퍼뜨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것이 내가 꿈꾸는 삶, ‘살아가는 동안 한 번은’ 이루고 싶은 나의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