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멈추지 않는 삶

by 코모레비

7월의 첫날,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었음을 알리기라도 하듯 바람 한 점 없이 내리쬐던 태양의 열기는 대단했다. 어느덧 해가 저편으로 저물어가고,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한낮의 뜨거움도 저녁 공기 속으로 서서히 자취를 감춘다. 낮 동안 널어 둔 빨래를 걷으려 거실을 가로질러 베란다로 향한다. 종일 에어컨을 틀어 놓느라 닫아 두었던 거실 미닫이 창문을 두 손으로 힘껏 밀어 본다. 드르륵. 반쯤 열린 창으로 바람이 들어온다. 꽤 선선한 바람이 기분 좋게 내 얼굴에 와 닿는다. 그 순간 나는, 무엇을 하기 위해 내가 여기에 와 있는지도 잠시 잊은 채 거실 창문틀에 걸터앉아 창밖을 내다본다. 어슴푸레 어두워지는 저녁의 배경 속에 담긴 창밖의 풍경들이 하나둘 시야에 들어온다. 무심한 듯 우뚝 서 있는 나무들, 옹기종기 모여 있는 꽃과 풀들, 낮의 열기 속에 달아올라 있던 돌들까지도 이 저녁 공기를 온몸으로 반기는 듯하다.


바스락바스락. 살랑이는 바람결에 나뭇잎들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조금 더 거세게 밀려오는 바람을 타고 나뭇잎들이 소리를 일으킨다. 쏴아…쏴아…. 커졌다가 작아지기를 반복하며 귓가에 들려오는 초록빛 파도 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바람 속 ‘흔들림’이 만들어내는 풀과 나무들의 소리, 숲의 향연이다. 작은 바람에는 작게 흔들리고, 큰 바람에는 크게 흔들린다. 어느 것 하나 방향을 달리하지 않으며, 모두 같은 흐름 속에 몸을 움직인다. 오랜 세월 자리를 지켜 온 힘센 나무라 해도 이 당연한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다. 땅에 뿌리를 박고 사는 그 어떤 생명도 저 바람을 이겨 보겠노라 저항하거나 맞서지 않는다. 예고 없이 임의로 불어오는 바람에 그저 제 몸을 맡길 뿐이다.


바람은 ‘지나가는’ 존재이다.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어느 한 방향을 따라 흘러간다. 그 흐름 속에 부딪히고 맞닿는 어떤 대상이 존재할 때, 우리는 ‘바람’을 보고 느끼고 경험한다. 하늘은 시시각각 다채롭게 변하는 색으로 자신을 말하고, 하늘을 배경 삼아 떠다니는 구름도 우리 눈에 보이는 다양한 형태로써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하지만 바람은 그렇지 않다. 나뭇가지에 달린 무성한 잎들이 소리를 내며 나부낄 때,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흩날릴 때, 길가에 늘어선 깃발들이 요란하게 펄럭이는 광경을 보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바람’의 존재를 확인하게 된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나며 시시각각 다른 ‘바람’을 경험한다. 따스한 봄볕이 내리쬐는 어느 봄날, 흐드러지게 핀 꽃들의 향기가 바람을 타고 밀려와 코끝을 간지럽힌다. 살랑거리며 불어오는 봄바람이 마음을 설레게 한다. 뜨거운 여름날의 열기 속에서 땀 흘리며 수고한 이들에게 바람은 깊은 밤 휴식처럼 찾아와 지친 어깨를 토닥이고, 노을 지는 가을 저녁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마음속 파고드는 휑한 쓸쓸함을 조용히 달래 주기도 한다. 한겨울 불청객처럼 찾아온 차디찬 바람이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를 지나가며 나무에게 말을 건넨다. ‘혹독한 이 계절을 잘 지나가 보자’라고. ‘내가 지나가고 나면 너는 더 깊고 견고한 생명력을 얻게 될 거야’ 라고.


인생의 계절에도 크고 작은 바람이 불어오고, 또 지나간다. 어느 때는 엄마의 손길처럼 다정하게 찾아와 나를 어루만질 때도 있었지만, 또 어느 때는 예고도 없이 매섭게 불어닥친 바람이 내 모든 것을 뒤엎어 버리는 것만 같은 순간도 있었다. 마치 나에게만 불어닥친 야속한 바람 같아서, 애꿎은 하늘을 향해 원망을 쏟아내 보기도 했었다. 바람은 그렇게 상처의 흔적만 남기고 제 갈 길을 가버리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이 바람이 남기고 간 전부는 아니었다. 시간이 흘러 뒤돌아보니,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추억이 남아 있었고, 한 뼘 더 자라 있는 내가 있었다. 바람이 어딘가로부터 불어와 또 어딘가로 흘러가듯, 내 삶도 멈추지 않고 여전히 흘러가고 있었다. 만약 내 인생에 바람 한 점 불어오지 않았다면, 메마른 무풍지대를 걸어와야 했다면 지금의 내 모습은 어땠을까?


바람 없는 인생, 아무런 슬픔도 아픔도 없는 삶. 그것이 나를 ‘행복’에 이르게 해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불어오는 바람에 인생을 맡기고 사는 것, 그것이 인간의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거스를 수 없는 바람에 내 몸을 싣고, 그 속에서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묵묵히 해나가는 것. 무책임하게 내던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시시로 다른 모습으로 찾아오는 바람의 결을 따라 겸허히 나의 오늘을 살아내는 것이다. 바람이 불어오면 오는 대로, 지나가면 지나가는 대로 내 삶에 크고 작은 흔적들을 남길 테니까. 바람이 불어오고 또 지나가듯, 인생의 어려움도 왔다가 지나가는 법이니까.


불어오고 흘러가기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이렇듯 바람은 내게 ‘멈추지 않는 삶’을 가르친다. 그저 흘러가 버린 것만 같은 그 어떤 바람도 ‘의미 없이’ 지나간 것은 없다. 아무런 바람도 불지 않는 인생, 어떤 소리도 움직임도 없는 무미건조함 속에서는 ‘진정한 나’를 만날 수 없을 거라고, 불어오고 지나가는 바람이 있었기에 내 삶이 ‘의미 있는’ 것이라고, 나를 다시 일깨운다. 바람은 오늘도 내게 말한다. 멈추지 말고 계속 흘러가라고. 후회와 아쉬움으로 가득한 과거의 순간들을 흘려보내고, 이전과 다른 새로운 바람을 가슴 열어 맞이하라고 말이다.


이 저녁, 바람결에 춤을 추듯 흔들리는 나무를 바라보며 생각한다.

너, 살아 있구나.

나도, 살아 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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