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음식에 담긴 추억

by 코모레비

오전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월요일, 오늘도 우리 집 현관 문고리에는 까만 비닐봉지 하나가 걸려 있다. 앞집에 사시는 할머니께서 걸어 두신 모양이다. 할머니는 주중에 손주들을 돌보느라 딸 집에 와 계셨다가 주말이면 시골집으로 돌아가시는데, 주말 동안 텃밭에서 수확하신 채소들을 가져오셔서 이렇게 나눠주신다. 그래서 때마다 넣어 주시는 채소의 종류도 철 따라 달라진다. ‘오늘은 어떤 채소가 들어 있을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봉지를 열어본다. 봉지 안에는 오이 두 개, 가지 두 개, 둥근 호박 하나, 오이고추까지, 정성스레 키우신 채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참 이쁘게도 키우셨다. 딸 같은 마음으로 주시는 거라며 7년 가까운 시간을 이렇게 한결같이 챙겨 주신다. 덕분에 다른 식구들 없이 혼자 먹는 나의 점심 밥상은 신선한 채소들로 한 상 가득 채워진다.

무엇을 만들어 먹으면 좋을까 하다가, 반질반질 연둣빛 둥근 호박에 눈이 간다. 자그마한 둥근 호박을 보고 있으니 여름이면 엄마가 만들어 주시던 음식들이 하나둘 생각난다. 잘 삶은 소면에 멸치 다시 국물을 붓고 달걀지단과 채 썬 단무지를 잔뜩 올려 만든 잔치국수, 포슬포슬 먹음직스럽게 한솥 삶아 주시던 햇감자, 그리고 둥근 호박을 먹기 좋게 썰어 양파, 고추, 다진 마늘까지 넣고 들기름에 볶아 먹던 호박볶음. 모두 엄마의 손맛이 담긴 익숙한 음식들이다. 따끈한 밥 위에 호박볶음을 듬뿍 넣고 고추장과 참기름, 여기에 달걀프라이까지 더해 쓱쓱 비벼 먹으면 달큼하면서도 매콤한 맛이 더운 여름날 입맛을 돋운다. 생각만 해도 입안에 군침이 돈다. ‘그래, 오늘 점심은 비빔밥이다!’ 우묵한 팬에 준비한 재료들을 넣고, 간을 곁들이며 주걱으로 뒤적여 주면 국물 자작한 호박볶음이 완성된다. 밥과 함께 매콤하게 비벼 만든 비빔밥을 크게 한술 떠서 입에 넣으면 여름 별미가 따로 없다. 오물오물 비빔밥을 먹으며 입안 가득 퍼지는 행복감을 느낀다. ‘음... 바로 이 맛이지!’

무덥던 어느 여름날 엄마가 정성을 다해 차려주시던 밥상, 소박한 음식들을 떠올린다. 늘 즐겨 먹던 음식, 언제 먹어도 질리지 않는 친숙한 맛이 잠시 잊고 있던 옛 기억을 불러온다. 매일 반복되는 듯한 일상을 살다가도 문득 과거 어느 순간의 기억이 되살아날 때가 있다. 어린 시절 엄마가 만들어 주시던 음식을 마주하게 될 때, 엄마와 함께했던 순간들을 추억하게 된다. 엄마가 되고 나니 엄마가 해 주시던 음식, 그 손맛이 더욱 그리워진다. 매 끼니 차려주시던 밥과 국, 반찬 하나하나에 담겨 있던 수고와 애씀을 그땐 미처 알지 못했다. 이른 새벽 피곤한 몸을 일으켜 쌀을 씻고 밥을 안치시던 그 말 없는 성실함을, 엄마가 되고 나서야 조금씩 깨달아 간다. 자식 입에 밥 한 숟가락이라도 더 넣어 주려 하셨던 엄마의 마음을, 자신에게 있는 것을 다 주고도 더 주지 못해 안타까워하셨을 그 마음을 이제야 조금이나마 헤아려 본다.

엄마는 늘 곁에 있는 사람이라 믿었고, 엄마가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본 적이 없기에 언제든 달려가면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내 욕심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엄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신 이후로는 당장 불가능한 일이 되었으니 말이다. 엄마를 떠나보낸 후에도 우리 집 냉장고에는 얼마 동안 엄마의 손맛이 담긴 몇몇 음식들이 남아 있었다. 엄마가 담가 주신 고추장, 김치와 장아찌 등. 그땐 엄마의 손길이 깃든 반찬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밀려오는 그리움에 왈칵 눈물이 쏟아지곤 했었다. 애써 기억을 덮어 두고 못 본 체하려 했던 날들도 있었다. 그로부터 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지금도 때때로 솟아나는 그리움은 어찌할 수 없지만, 그래도 이제는 그 기억의 순간을 마냥 슬퍼하지만은 않는다. 밀물과 썰물처럼 수없이 반복하며 지나간 ‘기억함’의 연습들이 어느새 나를 단단하고 의연하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그리움을 애써 밀어내지 않으며, 지난날 엄마와의 추억을 오랜 기억의 서랍 속에서 잠시 꺼내었다가 다시 잘 넣어두곤 한다.

늦은 저녁, 오랜만에 어머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아가씨네와 휴가 가신 곳이 너무 좋으시다며, 좋은 곳에 우리 가족과 함께 오지 못해 아쉽다 하신다. 그러다 얼마 전에 택배로 보내 주신 도토리묵과 동치미 육수 이야기를 꺼내시며 맛이 어땠냐 물으신다. 맛있게 잘 먹었다고 말씀드리자, 그제야 속에 있던 이야기를 꺼내신다.

“그 동치미 육수에 냉면 끓여 넣어 먹어도 맛있어…. 내가 아버지(시아버님) 돌아가시고는 냉면을 못 먹었어. 그 이후로 이번에 처음 먹은 거야.”

어머님의 떨리는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전해온다. 무슨 말씀을 하실지 알 것 같았다. 5년 전에 돌아가신 시아버님은 평생 지붕일을 해 오셨었다. 다른 식구들 모두 잠들어 있는 이른 새벽부터 일터로 나가 종일 힘을 쓰며 일하셔야 했기에, 몸이 고되실 수밖에 없었다. 무더운 여름 찌는 더위 속에서 땀 흘리며 일하고 돌아오신 아버님은 어머님께 국수나 냉면을 만들어 달라 자주 주문하곤 하셨다. 그땐 아버님 입맛에 맞춰 이런저런 음식을 만들어 드려야 하는 일이 힘들기도 하고 귀찮게 느껴지기도 하셨단다. 그러던 어느 추운 겨울날, 여느 때처럼 일을 나가신 아버님이 지붕에서 일하시던 중 갑자기 쓰러지셨고, 그게 아버님의 생전 마지막 모습이 되어 버렸다. 이후로 어머니는 아버님이 즐겨 드시던 음식을 볼 때면 아버님 생각에 마음이 아프셨던 것이다.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 마다하지 않고 가장이라는 책임감을 안고 날마다 지붕에 오르셨을 아버님을 떠올리면 미안하고 안쓰러운 마음에 목이 메셨던 것이다.

음식이 기억을 부른다. 그 기억 속의 ‘한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누군가를 위해 정성을 기울여 만든 음식을 먹는다는 것. 그 속에는 단순히 먹고 배를 채우는 것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 그것은 마치 ‘네가 있어 내가 있다‘라고 하는 서로의 존재에 대한 인정과 같은 것이며,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지는 나’로서 얻게 되는 안정감과도 같은 것이다.

과거 어느 날 ‘그 사람’과 함께 먹던 음식, 그 맛의 기억이 지금의 어느 순간과 맞닿아 그때를 추억하게 하고,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누군가를 기억하고 누군가에게 기억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사람이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 사랑하는 이들에게 남기고 가야 할 인생의 의미가 아닐까. 먼 훗날 우리 아이들에게도 나처럼 ‘엄마’를 추억하는 순간이 찾아오겠지? 그땐 내가 만들어 준 어떤 음식으로 엄마의 존재를 기억하게 될지 문득 궁금해진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부디 아이들에게 따스한 사랑의 기억으로 남기를, 음식 하나로도 추억하고 그리워할 존재가 있다는 것이 마음속 든든한 힘이 되어 줄 수 있기를 바란다. 지금 내게 남아 있는 기억이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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