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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에르떼 Oct 17. 2022

나의 파주 이야기

내 마음의 고향, 파주

6년 전 초봄이었다. 겨우내 잠들어있던 생명들이 기지개를 켜며 눈을 비비고 일어날 때, 나는 아직 컴컴한 이불속에 있었다. 그 당시 나는 흔히들 하는 미래에 대한 고민으로 몹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어두운 방 안에서 나 홀로 거대한 캔버스와 마주 보고 앉아있었다. 손에는 연필이  들려있었지만 점 하나 찍지 못할 만큼 위축되어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여기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무기력하게 가만히 있다간 어둠이 나를 집어삼킬 것 같았다.


먼 곳으로 훌쩍 떠나고 싶었다. 어디가 좋을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번뜩 머릿속에 떠오르는 곳이 있었다. 예전에 블로그에서 보고 마음속의 위시리스트에 추가해 두었던 파주 지혜의 숲이었다. 나는 곧장 파주로 떠났고 그곳에서 만난 지혜의 숲은 생각보다 더 멋진 곳이었다. 주황빛 서가들은 천장까지 가득했고 빼곡히 채워진 책들은 내게 알 수 없는 안정감을 주었다. 난 이곳에서 내 마음의 짐을 풀었고, 파주에 몸을 기대어 울기도 했다. 그리고 번잡한 생각들과도 이별할 수 있었다.

올해 10월, 나는 또다시 파주로 향했다. 직장 내 스트레스뿐만 아니라 건강상 문제로 심신이 많이 지쳐있었다. 아껴뒀던 여름휴가를 쓸 타이밍이 왔다고 느낀 난 휴가계를 제출하고 길을 떠났다. 지난 시간 내내 그리워했던 파주로. 내가 살고 있는 곳과 파주는 400km 이상 떨어져 있어 쉽게 갈 수 없었다. 마음이 힘들 때마다 파주가 생각이 났고 그곳에서 받았던 위안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언젠간 꼭 파주를 가겠다고 호기롭게 말하던 그 순간이 드디어 현실로 펼쳐지고 있었다.


ktx를 타고 서울에 도착하여 합정역에서 2200번 버스를 탔다. 창백한 빌딩 숲을 지나 비교적 한산한 도로를 달려 다산교에 하차했다. 파주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 온몸에서 행복 바이러스가 퍼졌다. 군장같이 무거운 가방이 내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지만 마음만큼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지도 앱을 나침반 삼아 지혜의 숲에 다다른 나는 심호흡을 하고 출입문을 열었다. 안에서 서가의 향과 책의 향기가 뒤엉켜 풍겨왔다. 6년 전 그때의 향이었다. 그 향은 나를 6년 전 그날로 데려가 주었고, 나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삼켜야 했다.


프런트에서 체크인을 하고 지지향으로 올라갔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매력적인 마룻바닥, 나무가 주는 따뜻한 교실의 느낌은 그대로였다. 아…… 나는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내가 이곳에 서있다는 자체가 나에겐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창 밖의 따스한 햇살도 나를 반겨주었다. 짐을 풀고 지혜의 숲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날은 회사 워크숍으로 약간의 소음이 있었다. 스피커를 때리는 음악 소리가 거슬릴 법도 했지만 그것도 나름대로 괜찮았다. 차가운 갈색 빛의 녹물이 숙소 내 화장실에 자리해도 괜찮았다. 파주니까 모든 게 괜찮았다. 파주는 나를 관용적인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나는 지혜의 숲을 잠시 나와 출판단지 거리를 걸었다. 담벼락 위에 붉게 물든 담쟁이가 가을의 정취를 물씬 더했다. 조용하고 한적한 거리, 자동차의 엔진 소리마저 간간이 들리는 그곳은 나에게 천국이었다. 시끄러운 사람들의 소리, 빵빵 울려대는 경적소리에 움츠리고 있던 내 마음이 이곳에서는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켰다. 거리에는 바스락거리는 낙엽의 향이 올라왔다. 가을 햇살에 알맞게 구워진 바삭한 낙엽의 향이 나를 기분 좋게 했다.


갤러리 박영과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에서 작품들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림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붓의 움직임을 상상했다. 열화당 책박물관에서는 고서들을 비롯한 다양한 책을 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거대한 책의 바닷속에 발을 담그고 있는 기분이었다. 천 년의 세월을 품고 있는 고서와 2022년을 살고 있는 나의 만남은 몹시 흥분되었다. 이것이 기록의 힘이라는 걸까. 선조들의 생각을 후대의 사람들이 읽고 배울 수 있다는 건 기록이 준 커다란 선물 같다.


거리를 걷다 보면 버드나무가 자주 보였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버드나무는 꼭 가야금 연주처럼 보였다. 선선한 가을바람은 연주자가 되고, 버드나무의 잎들은 가야금의 줄이 되어 살랑살랑 흔들리며 아름다운 음악을 선사한다. 햇살에 빛나는 버드나무 잎들이 유독 예뻐 보였다.


예전에는 사계절에 굴하지 않고 우직한 모습을 지키고 있는 소나무 같은 삶을 살고 싶었다. 한 번 목표를 정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밀어붙이는 태도가 옳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삶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고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다. 목표를 정하고 곧이곧대로 그 길을 걷는 것도 중요하지만 갈등이 생기고 불안한 마음이 든다면 한 발자국 떨어져서 다시 생각해보는 여유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바람결에 따라 흔들릴 줄도 알고 햇빛이 비치면 반짝반짝 빛을 낼 줄 도 아는 버드나무 같은 삶을 살고 싶다. 내 마음속에 숨구멍을 만들어놓고 여유를 갖고 모든 걸 바라보고 싶다.


파주는 내게 숨구멍이 되어주는 곳이다. 내가 힘들 때나 지칠 때 내 생각의 짐을 덜 수 있는 곳. 도시의 소음을 피해 늘 하고 다니던 이어폰도 필요 없는 곳. 그저 새소리,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사색에 잠기도록 도와주는 곳이다. 파주에 오면 번잡한 생각은 사라지고 마음속에는 평온함이 잉크처럼 퍼진다. 자동차에게 기름을 채워주는 주유소가 있다면 내겐 새로운 의지를 가득 채워주는 파주가 있다.


지금도 내 앞에는 거대한 캔버스가 있다. 하지만 더 이상 어두운 방 안에 갇혀 있는 게 아니다. 지금 내가 있는 방은 지혜의 숲 서가처럼 주황빛으로 가득 차 있다. 6년 전보다는 좀 더 강해진 내가 거대한 캔버스 위에 스케치를 그리고 있다. 이 그림이 언제 완성될진 아무도 모른다. 그렇지만 파주가 내 곁에 있는 한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파주는 내게 위로를 주고 응원을 해주는 내 마음의 고향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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