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by 수에르떼

뮤지컬이라는 장르의 매력을 알게 된 건

고등학생 2학년 때였다.

전에는 어렴풋이 들어서 알고 있던 수준이었지만

고2 때 뮤지컬 덕후인 국어 선생님을 만난 후 달라졌다.


선생님은 가끔 수업 시간에 여유가 있을 때면

뮤지컬 이야기를 해주셨다. 좋아하는 작품과

배우의 이야기를 하실 때면 선생님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초롱초롱 빛났다.


어떤 날은 무려 강동원을 닮은 배우가 있다며

그 배우가 출연하는 뮤지컬 홍보 영상을 보여주셨다.

저화질을 뚫고 나오는 미모에 반 아이들은

연신 감탄하며 고주파를 내질렀다.


나는 미모도 미모지만 배우의 목소리와

노래 실력에 더 감동받았다.

이 뮤지컬을 실제로 보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작은 소망이 생겼다.


수능이 끝난 뒤, 다양한 수험표 혜택이 쏟아졌고

나와 친구들은 신중한 고민 끝에 뮤지컬 관람 할인을

선택했다. 우리 모두 그 선생님께 수업을

들었던지라 마음속에 뮤지컬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다.


생전 처음 본 뮤지컬 레미제라블은 감동 그 자체였다.

정성화 배우의 천장을 뚫는 듯한 강인한 목소리에

입이 떡 벌어졌다. 이게 말로만 듣던 뮤지컬이구나!

그 이후로 난 뮤지컬에 푹 빠져버렸다.




돈이 생길 때마다 차곡차곡 모아서 기회가 생기면

혼자 뮤지컬을 보러 갔다. 늘 무대와 가까운 자리를

예매해서 가격이 꽤 나가긴 했지만 내가 느끼고 온

감동에 비하면 그 돈은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뮤지컬은 한정적인 공간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보여주는 종합 예술 세트였다.

춤이면 춤, 노래면 노래, 분위기 따라 바뀌는

무대 장치까지 감탄이 절로 나왔다.

무대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에너지에 압도되고

시원하게 내지르는 고음에서 카타르시스까지 느꼈다.


그때의 나는 기존에 다니고 있던 학교를 휴학하고

다른 미래를 위해 한창 공부 중이었다.

걸림돌 없이 제 나이에 맞는 속도로 달려 나가는

친구들을 보며 나는 한참 늦은 느낌이 들었다.

스스로를 남과 비교하며 괴로워하고 걱정도 많았다.


그런 나에게 뮤지컬은 유일한 도파민이었다.

뮤지컬을 보고 오면 정체되어 있던 온몸의 피가

빠르게 도는 것처럼 도파민이 빵빵 터졌다.

미래에 대한 불안함과 현실의 답답함에 꽉 막힌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어 속이 시원하기까지 했다.


뮤지컬 관람을 하며 얻은 에너지와 열정으로

다시 일상에 복귀할 수 있었고, 마음이 너무

힘들 때면 뮤지컬 넘버를 들으며 위로받았다.

그렇게 굵직굵직한 뮤지컬을 보면서 힘든 시간을

잘 이겨낸 난 무사히 취업에 성공했다.

취업 후 타지 생활을 시작하면서 뮤지컬과는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늘 뮤지컬에 대한 사랑이

남아있었다. 4년 전 동생과 함께 본 노트르담드 파리

내한 공연이 마지막이었는데 얼마 전

위키드 내한 공연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국 배우들의 공연을 보며 큰 감동을 받았던 터라

내한공연은 꼭 보고 싶었다.


다행히 오빠도 뮤지컬에 관심이 있다고 해서 설레는

마음으로 함께 보러 갔다. 20대에 늘 다녔던 공연장을 결혼 후 오빠랑 다시 오게 되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뮤지컬을 통해 얻은 행복과 기쁨을 함께 공유할 수 있게 된 것도 참 좋았다. 인터미션 시간을 합쳐 총 170분 동안 우리는 황홀한 에메랄드 빛 환상에 젖어있었다.


뮤지컬을 보고 난 후 오빠의 표정에는 환희와 충격

그리고 행복함이 가득 묻어있었다. 오빠는 소극장

연극이나 뮤지컬 빨래는 봤었지만 이렇게 큰

대형 뮤지컬은 처음이라서 더 푹 빠져서 봤다고 했다.

아이처럼 좋아하는 오빠의 모습을 보니 나까지

기분 좋아졌다.


나 또한 오랜만에 뮤지컬을 보니 추억도 새록새록

생각나고 재밌게 잘 관람했다. 그런데 그뿐이었지

예전처럼 피가 돌거나 흥분되는 느낌은 없었다.

그저 좋은 공연을 잘 봤구나. 그게 다였다.

이토록 무미건조한 감상평이라니...

처음엔 좀 당황스러웠다.


20대의 내 삶에는 큰 위로와 쾌감을 안겨줬던

뮤지컬이 지금은 그저 오빠와 함께 본 즐거웠던

공연 그뿐이 된 것이다. 그때와 달리 지금의

내 상황이 좀 더 안정적이고 편안해져서

뮤지컬이 내게 주는 감흥이 예전보다 덜한 걸까?




지금의 내 삶은 20대에 비해 많이 평온해져서

뮤지컬을 봤다고 해서 예전만큼의 행복함을

느끼지 못하게 된 것 같다. 물론 자잘하게 힘들고

고단한 삶에 지칠 때도 있지만 그럴 땐

뮤지컬보단 푹 쉴 수 있는 여행이 도파민이 되어준다.


웅장한 무대와 화려한 의상, 그 무대에 깃든

배우들과 스태프들의 노력의 산물을 보며

에너지를 얻는 것보단 정적인 예쁜 숙소에서

자연과 하나 되어 편안하게 쉬는 게

내게 더 큰 행복함과 쉼을 선사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뮤지컬에 대한 내 마음이 식은 건 아니다.

이제 뮤지컬은 단조로운 일상을 잠시 잊게

해주는 마법의 시간으로 남았다. 그 시간만큼은

현실을 잊고 공연에 푹 빠질 수 있으니 말이다.


뮤지컬을 생각하면 괜히 마음이 아련해진다.

그때의 내가 생각나 기분이 촉촉해진다.

뮤지컬은 어둡고 눅눅했던 내 청춘의 이면에 빛을

내어준 소중한 친구였다. 20대 시절 뮤지컬 덕분에

내 통장은 텅 비었지만 내 마음은 행복으로 가득 찼다.


내 삶의 주인은
바로 내가 돼야만 해
이젠 알아
진정한 나의 인생은
진한 리듬 속에
언제나 내가 있다는 것
- 임상아 <뮤지컬>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기나긴 터널을 지나

나는 내 삶의 주인공으로 우뚝 섰고

나만의 리듬 속에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내 청춘의 기억 한 조각에 뮤지컬이 자리하고 있어

참 든든하고 행복했다. 이제는 오빠와 함께

뮤지컬에 대한 새로운 추억을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