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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w Jul 29. 2022

때론 떨어져 보아야 더 잘- 알 수 있는 것들

거리와 감정의 관계에 관한 고찰




해외에서 홀로 살아간다는 것. 그건 곧 무언가와 '떨어져' 있다는 뜻이다.


떨어져 있다는 것은 거리가 있음을 의미한다. 거리는 대상과 대상 사이의 공간적 간격을 만든다. 촘촘했던 대상 사이에 거리와 공간이 생기면 그 틈 사이로 생각과 감정이라는 것이 새롭게 차오른다.


한국에서 미국.  10,000km, 비행기로 12시간. 그리고 미국 생활 5 . 떨어진 거리와 시간만큼 생긴 공간은 내게 부모님, 그리움, 소중함〉으로 채워졌다.




사실 나는 좀 이기적인 딸이다. 처음 미국에 갈 결심을 했을 때만 해도 가족보다는 내가 먼저였다. 나의 만족, 나의 행복, 나의 성취, 나의 꿈이. 모든 일엔 늘 '나'를 중심에 두었다. 그렇게 부모님의 자식을 향한 응원과 걱정이 동시에 담긴 촉촉한 눈빛을 뒤로한 채. 미국에 왔다.


그런데 나이가 든 건지, 철이 든 건지, 5년 차 해외생활로 인한 향수병 때문인지. 최근 1-2년 전부터 이런 생각과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스스로 좋자고 선택한 미국행이었지만 어느 순간, 자식으로서 해외에 떨어져 있다는 사실 자체에 부모님께 왠지 모를 죄송한 마음이 드는 것이었다.

지지고 볶더라도 인생의 어느 기쁘고 슬픈 순간을 함께할 수 없음에. 특별할 것 없이 차려진 평범한 밥상일지라도 마주 보며 같이 밥을 먹을 수 없음에. 별것 아닌 일상의 이야깃거리를 주제로 웃고, 대화할 수 없음에. 자꾸만 엄마가 그립고 보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엄마와 아빠는 어딜 다녀오실 때마다 가족 카톡방에 사진과 동영상을 올리신다.


"오늘은 날씨가 참 좋더라. 활짝 핀 봄꽃들도 예쁘고."
"주말에 갔던 식당의 음식이 참 맛있더라고. 다음에 한국에 오면 같이 가자."


그런데 사진 속 부모님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예전과 사뭇 달라진- 나이 드신 부모님의 모습에 눈물샘이 예고 없이 왈칵- 하고 꼭지를 튼다.


'언제 이렇게 나이가 드셨지?'


예전 같으면 그 사진들을 쓰윽 한번 보고 넘겼을 텐데. 요즘엔 '오늘 가장 젊은' 부모님의 모습을 담아두고 싶어 그것들을 사진첩에 저장하는 일이 부쩍 늘었다.



멀리 떨어져 있으니 사진과 영상통화로 마주하는 부모님의 나이 드신 모습이 익숙지가 않다.

예전엔 카랑카랑했던 잔소리의 크기가 조금씩 줄어드는 엄마를 보니 오히려 속상해진다. 또 언젠가부터 엄마에게서 살아생전 외할머니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수화기 넘어 들리는 엄마의 목소리에서 예전 외할머니의 음성과 말투가 묘하게 닮아있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이젠 잔소리보다 응원과 사랑의 말을 더 표현하시는 엄마를 보면 괜히 부끄럽고 낯설어진다.

살결 부딪히며 함께 살아야만 느낄 수 있는 일상적인 엄마의 잔소리가 그립다.


"밥 다 먹고 항상 바로바로 설거지해야 냄새도 안 나고 벌레가 안 생겨."
"주말엔 방청소도 좀 하고 안 입는 옷도 정리해야지."
"지금이 몇 시야? 너무 늦게 다니지 말고 오늘은 일찍 들어와."
"어휴, 방바닥에 머리카락 떨어진 것 좀 봐. 드라이기 사용하고 그때그때마다 쓸어 담으면 깨끗하지."




하지만 만약 전처럼 한국에서 부모님과 한집에 살았다면 아마도 여전히 잘- 느끼지 못했을 것 같다.


어느샌가 나이가 드신 부모님의 모습을.

늘어난 엄마의 주름을.

줄어든 엄마의 잔소리를.

소화가 잘 안 되신다며 예전보다 줄어든 아빠의 공깃밥 양을.




어떤 대상과의 거리 또는 공간적 간격이 너무 좁을 때는 대상에 대한 생각 혹은 감정의 환기가 쉬이 일어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때론 우리는 대상과 의도적인 물리적, 정서적 거리를 두기도 한다.


관계에서 생각 정리가 필요하거나 헤어짐을 고민 중인 연인이 상대에게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우리 시간을 좀 갖자."  


여기서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곧 대상과 대상 사이의 거리적, 공간적 떨어짐을 의미하기도 한다.

대상과 떨어져 있을 때, 오히려 생각이 가지런히 정리되거나 무언가를 불현듯 깨닫거나 혹은 감정이 환기되는 경험을 한 적이 한 번쯤 있을 것이다.

 


나 역시 부모님과 10,000km와 5년이라는 시·공간적 거리가 생기자, 비로소 생각과 감정의 공간이 넓어져 이전엔 느끼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되돌아보게 되었다. 먼저,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과 소중함의 감정은 해를 거듭하며 커져갔다. 그리고 나를 둘러싸고 있던, 내가 누렸었던 것들에 대해 원점의 감정으로 돌아가 그것들을 하나씩 더듬어 보았다.


- 김치부침개와 미역줄기 볶음, 내가 좋아하는 반찬들로 가득한 엄마의 밥상

- 주말 아침, 아빠가 돌리는 청소기 소리에 늦잠에서 깨어났던 어느 날

- 세일에서 건지셨다며 잔뜩 신난 아이의 표정으로 구입한 옷을 자랑하시던 엄마의 얼굴

- 가끔 투닥투닥하셔도 36년째 여전히 서로 베스트프렌드인 엄마 아빠의 대화 소리


그러자 그 당시에는 '소소해 보였던' 것이 사실은 얼마나 '크고 대단한' 것이었는지를 비로소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었다. 예전에는 그저 아무렇지 않게,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던 일상의 조각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중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생각과 감정의 환기가 불러온 깨달음은 주어진 모든 것들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했고, 이로 인해 나는 조금씩 변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매일 퇴근길, 엄마에게 먼저 전화드리고 안부 묻기

 가족에게 사랑과 감사의 표현 더 많이 하기

 엄마의 잔소리에도 짜증 내지 않고 그저 들어 드리기

- 내가 매일 누리고 있는, 내게 주어진 모든 것들에 늘 감사하는 마음 갖기



때론 떨어져 보아야 더 잘-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특히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들일수록 더더욱 그렇다.

나 또한 10,000km라는 거리가 준 교훈으로 소중한 것들에 더욱 감사하며 전보다 조금은 '덜'이기적인 딸이 되려고 노력 중이다.


 


ܤ 짧은 생각, 하지만 한 번쯤 필요한.

연인 혹은 친구, 부모님. 때론 어떤 대상과 의도적인 거리와 공간을 만들어 보는 것도 괜찮아요.
떨어진 틈 사이로 생각의 공간이 넓어지면 이전에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감정과 깨달음을 발견할 수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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