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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정 Sep 04. 2023

삼천 원어치 생색

삼천 원어치 갑질

   


  혼자 주차장에 차를 대고 고요하게 있을 때, 부끄럽기 짝이 없는 순간이 문득 떠 오른다. 지켜보는 CCTV 때문도 아닌데 없는 쥐구멍이라도 찾아 머리를 숨기고 싶은 심정에 얼른 집으로 들어온다. 벌써 몇 년 전 일인데도 달아오르는 얼굴은 시간이 갈수록 더 하다.

  과거에 미용실은 동네 사랑방이었다. 주인은 누구 엄마 혹은 ㅇㅇ미용실 아줌마였다. 명절이 가까워지면 너나 할 것 없이 각양각색의 빛나는 공단 보자기를 머리에 두르고 앉아 있었다. 유달리 바글바글 머리를 말아놓은 때라도 “이래야 오래간다”하는 한 마디에 그러려니 수월하게 넘어갔다. 요즘에는 뭐든지 큰 자본을 들이고 많은 직원을 고용해서 대형화하면서 남녀 없이 헤어디자이너라는 전문직으로 자리를 잡아 선생님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만큼 요구사항도 많고 또 불만도 직접 표현하는 고객을 상대해야 하니 체력으로나 심적으로나 어려운 직업군이다. 

  어쩌다 돈 자랑을 하고 싶은 손님이 오면 납작 엎드려 비위를 맞추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것은, 종으로서가 아니라 헤어숍의 주인으로서 손님에 대한 서비스 정신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러운 행동인 것이다. 손님입장에서는 같은 돈을 내면서 나를 여왕 모시듯 해 주는 곳에서 대접받고 싶은 마음이 당연하다. 한 번 내 마음에 쏙 들게 머리모양을 만들어 주고, 거기에 립서비스까지 얹어주면 몇십만 원짜리 VIP Member로 등록하는 것을 아끼지 않을 용의가 충분히 생긴다. 머리는 자라고 다시 관리를 받으러 갈 곳에 영혼까지 홀가분하게 자존감을 올려주는 서비스를 맡아놨다는 믿음이 VIP카드로 내 손에 쥐어지기 때문이다. 


  봄방학 기간이었다. 딸아이와 함께 길게 자란 머리를 손질하기 위해서 지점을 거느린 꽤 이름이 알려진 미용실을 찾았다. 입구에 들어서니 대기자명단이 있었다. 컷, 염색, 펌으로 필요한 것에 체크하고, 원하는 디자이너를 적는 칸도 있었다. 연중행사처럼 미용실을 찾는 터라 이전에 누구에게 받았는지 딱히 이름을 기억하지 않았거니와 어떤 사정이었는지 갈 때마다 앞에 서비스를 받았던 미용사는 없었다. 어림짐작으로 이곳 디자이너는 샵 안에서도 각자 점한 좌석이 있고, 자신을 찾아온 손님에 비례해서 수익을 가르는 방식으로 운영하는 듯 보였다. 단지 나는 내가 정한 가격대로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곳을 가는 이유가 다분했다.

  대기하던 남자 컷 손님이 나가고, 다음 내 차례가 왔다. 세련되지 않은 의상에 날렵한 체격의 곱슬머리 남자미용사가 가벼운 몸동작으로 가운을 건네며 미용 의자로 안내했다.

  은은한 조명이 정면 거울을 감싸고, 머리 위에 스포트라이트가 켜진 의자에 앉아서, 마치 텔레파시라도 보낼 것처럼 미용사에게 집중했다. 내가 원하는 모양의 헤어스타일을 빠짐없이 설명하기 위해서 컷 할 길이를 짚어주고, 라인도 일자가 아니라 약간 V라인으로 머리층도 너무 똑떨어지지 않게, 드라이했을 때 자연스러운 웨이브가 나오도록 가볍게 해 달라고 했다. 그러고도 모자라 내가 찾아온 모델의 사진까지 휴대폰에 저장해 뒀다가 이렇게 해달라고 보여주고 알겠다는 사인을 받고서야 마음을 놓았다. 미용사와의 눈치게임은 잠깐 접어 두고 그 뒤부터는 머리를 내맡겼다.      

  그는 가위질하는 손목의 각도와 스냅, 빗질할 때 섹션을 나누는 섬세함과 스피드, 가끔 나와 마주치는 눈빛에서 오는 ‘네가 원하는 길이가 맞지?’라는 듯한 표정까지 불과, 한 시간도 채 안 되는 작업 안에 온전히 ‘디자이너선생님을 믿습니다’라고 마음을 바꿔놨다. 딸아이도 나와 비슷하게 해 달라고 한 뒤, 열정적으로 머리를 다듬는 자세를 뒤에서 지켜보면서 탈바꿈한 아이의 모습이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러웠다. 

  카운터에서 디자이너선생님 이름으로 계산을 했다. 학생은 만원 어른은 만칠천 원이었다. 선뜻 삼만 원을 내면서 잔돈은 안 받겠다 했다. 굳이 삼천 원을 거슬러주기에 선생님 음료수라도 드시라고 전해달라고 했고, 주춤거리는 우리를 보고 미용사는 카운터로 왔다. 직원이 여차해서 이러하다고 설명을 해서 나도 그에 약간의 미소를 보냈다. 그런데, 갑자기 90도로 고개를 숙이면서 큰소리로 “감사합니다.”라고 하는 게 아닌가. 

  몇십 만원 하는 VIP Member를 등록한 것도 아니고, 가격이 비싼 클리닉을 받은 것도 아닌데 마치 조직에서 보스에게 인사하듯 하니 민망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과연 삼천 원이 그가 나를 향해 이렇게 머리를 조아리게 할 가치였는지 당황스러웠다.     

  고마움을 표현한다는 것이 아이를 지켜보느라 바깥에 나가서까지 음료수를 사 올 상황은 안되어서 손쉽게 생각해서 잔돈을 안 받았을 뿐이었다. 

 솜씨가 좋다고 머리를 마음에 들게 잘 만져줘서 고맙다고 인사하고 팁을 남겨 놓는다고 해야 했다. 그냥 쉽게 말하면 될 것을 타이밍 놓치고 쭈뼛거리다가 선의도 제대로 전달 못했다.

  그 디자이너의 직업애에서 오는 순수한 반응에 어쭙잖게 몰래 남긴 팁으로 생색내고 싶었던 속내가 갑질 아닌 갑질이 된 것 같아 아직도 부끄럽고 등골이 오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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