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하는 개인, 욕망하는 사회, 그리고 결핍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오해가 없기 위해 몇 가지를 먼저 밝힌다. <오징어 게임>은 분명 아쉬운 점이 많은 드라마다. "한국에서 생소한 장르로 이 정도 한 거면~"은 그것들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 없다. 이 글은 <오징어 게임>을 변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이 보호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오징어 게임>의 성취다.
2.
이 드라마에 제기되는 비판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데스게임의 장르적 재미를 살리지 못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확히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두 비판점은 개별적인 것이 아니다. <오징어 게임>은 데스게임의 장르적 재미를 희생하는 대신 사회에 대한 은유를 견고히 하는 방식을 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드라마를 읽어내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무엇을 포기했는가'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장르 특성상 클리셰가 넘쳐나는 와중에도 <오징어 게임>은 어느 지점에서 분명하게 클리셰를 배반한다. 그것이 바로 데스게임을 사회로 전환시키기 위해 필요했던 희생이다.
3.
<오징어 게임>은 무엇을 포기했는가?
첫째, 게임이 치밀하거나 정교하지 않다. 따라서 지적인 묘수를 찾아내어 문제를 해결하는 카타르시스가 없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그다지 많은 전략을 요하지 않는 '애들 게임'이 전부다. 이건 명백히 의도된 설정이다. 브레인을 담당하는 상우(박해수)가 "애들 게임 규칙 단순해"라고 말한 것이 단적인 증거다. 그렇기 때문에 기훈(이정재)이 최종 우승자가 된 것도 기훈 개인의 능력으로 얻어낸 게 아니다. 기훈이 혼자의 힘으로 이긴 게임은 사실상 '설탕 뽑기' 말고는 없다.
둘째, 게임을 언제든지 포기할 수 있다. 기본 규칙 제3항, '참가자 과반수의 동의 하에 게임을 중단시킬 수 있다.' 실제로 이 규칙에 힘입어 극 초반에 게임이 한 번 중단된다. 이 규칙은 모든 게임이 끝날 때까지 유효하기 때문에, 기훈은 결승전인 오징어 게임에서 승기를 잡은 순간에도 상우에게 게임을 포기하자고 말한다. 이 장치는 외려 독이 될 수도 있는데, 관객들이 언제든 '그냥 그만두면 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하게끔 만들기 때문이다.
셋째, 주최 측은 절대적 권위가 없다. 화장실 좀 보내달라는 미녀(이주령)의 아우성에 그대로 굴복하는가 하면, 장기밀매를 위해 결탁한 의사 병기(유성주)에 휘둘리기까지 한다. 참가자들의 질문이나 이의 제기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일꾼들의 모습은 카리스마가 아닌 무능함으로 읽힌다. 아니나 다를까, 일꾼들은 참가자보다 훨씬 엄격한 통제를 받으며 지금 갇혀있는 사람들이 참가자가 아니라 일꾼들이라는 인상을 준다. 주최 측에 카리스마가 부재하기 때문에, 관객은 이 장르에서 마땅히 느껴야 할 위압감을 느낄 수 없다.
4.
<오징어 게임>은 왜 이런 희생을 감행했는가? 사회가 이렇기 때문이다.
첫째, 사회의 규칙은 엄청나게 복잡한 것이 아니다. 일을 하면 돈을 번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 좋은 대학을 나오면 좋은 회사에 간다. 이것들은 아주 어릴 적부터 우리가 내면화해 온 게임의 규칙이다. 물론 고도화된 현대 사회를 '애들 게임' 몇 가지로 퉁치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겠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이 게임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돈을 버는지 몰라서 돈을 못 버는 사람은 없다.
둘째, 사회는 우리에게 이 게임에 참여하라고 강요한 적이 없다. 우리는 사회를 위해 강제 노역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 아닌가. 이것은 세 번째 희생과도 연결이 된다. 즉 사회는 우리를 의도적으로 괴롭히는 것이 아니다. 주최 측의 모습은 관료제 시스템과도 닿아 있다. 그들의 최종 목표는 더 나은 게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탈 없이 굴러가도록 하는 것이다.
5.
정리하자면 시스템은 카리스마적 권위가 아닌, 우리가 어릴 적부터 합의한 규칙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그런데 그렇게 움직이는 시스템은 꼭 우리를 못살게 구는 것처럼 보인다. 왜?
<오징어 게임>은 힌트를 던진다. 2화에서 준호(위하준)가 실종된 형을 찾기 위해 고시원을 수색하는 장면에서, 책상 위에 노골적으로 존재감을 내뿜는 책이 한 권 있다. 자크 라캉의 <욕망 이론>이다. (라캉 이론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겉핥기로 공부했음을 미리 알린다.)
인간은 왜 늘 욕망하는가? 라캉은 이를 상상계와 상징계로 설명한다. 상상계는 아기의 세계다. 아직 타자(他者)를 모르는 아기는 어머니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어머니는 아기의 모든 욕구(욕망이 아니다)를 들어준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똥을 싸게 해 준다. 이윽고 아기는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을 바라게 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어머니가 욕망하는 것을 행하려고 한다. 즉,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그러나 이는 타자인 아버지의 등장으로 좌절된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사랑하기 때문에, 아기에게 무한한 사랑을 줄 수 없다. 가장 근원적인 형태의 욕망은 이로써 결핍의 상태에 머무른다. 아기는 성장하면서 타자를 깨닫고, 또 언어라는 새로운 규칙을 배운다. 이제 아기는 이미지로 상상한 것들을 언어라는 틀에 맞춰야만 한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욕망의 결핍이 생긴다. 이러한 결핍은 아무리 채워도 결코 해소되지 않는다. 욕망은 근본적으로 타자의 욕망이고, 인간은 사회라는 틀에서 타자와 무한히 교류하며 새로운 욕망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6.
라캉의 욕망 이론을 어떻게 <오징어 게임>에 적용할 수 있는가?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했다. 기훈을 비롯한 모든 참가자는 '오징어 게임'의 존재를 알기 전까지 456억을 벌고 싶다고 욕망한 적이 없다. 주최 측, 그러니까 사회가 참가자에게 이러한 욕망을 주입한 것이다. 456억 같이 거창한 액수가 아니더라도 우리의 욕망은 늘 이런 식으로 발현된다. 멋있는 광고를 보거나, 친구의 자랑을 듣거나, 연예인이 들고 다니거나 하는 이유로 우리는 또 새로운 것을 사고 싶어진다.
돈을 벌 만큼 벌면 끝인가? 돈에 흥미가 떨어지면 인간은 다른 것을 욕망한다. 최종 흑막인 일남(오영수)은 재미를 위해 이 게임을 기획했다고 밝힌다. 그리고 즐거웠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추억의 게임들을 바탕으로 데스게임을 설계한다. 이때 자신의 어린 시절은 일남에게 또 하나의 타자가 된다. 자신이 영원히 붙잡을 수 없는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 이 역시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욕망은 모두 해소되지 못한다. 기훈은 우승자가 되어 456억을 손에 쥐었지만, 1년 동안 그 돈을 쓰지 못하고 결국 상우의 어머니에게 넘겨주고 만다. 일남은 '사람을 믿냐'며 기훈에게 죽기 전 마지막 내기를 제안하지만, 그 내기에서 패배하고 숨을 거둔다. 자신이 기획한 게임의 근본 바탕이 되는 '사람에 대한 불신'은 부정당하고 만 것이다.
여기까지 왔을 때, 우리는 비로소 <오징어 게임>을 결핍의 서사라고 말할 수 있다. <오징어 게임>은 욕망하는 인간, 그리고 그 욕망의 결핍을 다루는 드라마다.
7.
라캉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계승한 철학자로, 그의 이론은 주로 자아, 즉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다. 따라서 이 이론을 사회적인 차원으로 확장하는 것이 <오징어 게임>을 읽어내는 마지막 단계다.
개인은 욕망한다. 욕망하는 개인이 모인 사회도 욕망한다. 사회는 무엇을 욕망하는가? <오징어 게임>에서 사회는 주최 측이므로, 사회의 욕망은 주최 측의 욕망이다. 주최 측은 무엇을 욕망하는가?
여기서 '평등'이라는 단어를 꺼내면 실소를 터뜨릴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드라마에서 유일하게 주최 측이 내세운 가치는 아이러니하게도 평등이다. 의사 병기와 실랑이하던 주최 측 인원을 총살하며, 프론트맨(이병헌)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이 게임에서 평등이라는 마지막 기회를 준 거라고. 그 원칙은 깨지면 안 된다고.
사회가 평등을 욕망한다는 것과 개인이 평등한 사회를 욕망하는 것은 다르다. 애초에 전자의 평등은 우리가 생각하는 따뜻한 개념과 거리가 멀다. <오징어 게임>에서 사회가 이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택한 방법은 사람을 사람이 아닌 '말'로 보는 것이다. 개인의 삶과 서사를 제거하고 오직 숫자로만 바라볼 때, 참가자들은 모두 동일해질 수 있다. 가령 456억은 사람 머릿수에 1억 씩을 곱해서 만든 숫자다. 여기에서 사람 하나는 그저 1억만큼의 가치를 지닌다. 또한 사망은 탈락의 동의어다. 주최 측 앞에서 "사람이 죽었잖아요"는 아무 호소력을 갖지 못한다. 개인의 삶을 무시한다는 것은 곧 개인의 죽음을 무시한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회는 그런 식으로, 삶을 무시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아마도 기훈 캐릭터의 모티브가 되었을) 쌍용자동차 사태가 그랬고, <오징어 게임> 직전에 나온 <D.P.>가 그랬다(여기에도 "사람이 죽었잖아"라는 대사가 나온다).
그러나 개인의 욕망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욕망도 끝내 해소되지 못한다. 그리고 그 원인은 다름 아닌 개인이다. 기훈이 우승 상금을 쓰지 않았을 때, 그것은 기훈 개인에게도 좌절이었지만 주최 측도 적잖이 당황시켰다. 평등을 지켜내며 무사히 끝난 게임을 기훈이 부정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게임의 배후를 쫓고 프론트맨에게 총알을 남긴 경찰 준호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욕망하는 개인이 있는 이상, 사회의 욕망은 결핍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8.
사람의 욕망은 상징계인 사회로 인해, 사회의 욕망은 삶과 서사가 주어진 개인으로 인해 좌절당한다. <오징어 게임>이 비극적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우리가 영원히 욕망하는 개인인 이상, 우리는 영원히 결핍된 개인이고 또 우리와 사회는 영원히 충돌한다. 그것은 사회가 우리를 괴롭히려 들기 때문도 아니고, 사회가 우리에 비해 한참 뛰어나기 때문도 아니다. 그저 개인과 사회가 모두 욕망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