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꿈과 영화에 대한,
1.
이 글은 무엇인가. 삶과 꿈과 영화에 대한 글. 적어도 내가 시도하려 했던 것은 그렇다. 삶과 꿈과 영화에 대한 글. 그런데 글이 아니라고 한다면. 삶과 꿈과 영화에 대한, 사유인가? 그러기에는 연결고리가 빈약하다. 낙서인가? 그렇게 대충 지어낸 얘기는 아니다.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삶과 꿈과 영화에 대한, 영화, 를 위한 글. 무엇이 먼저였는지 모르겠다. 영화를 만들기 위해 이 글을 쓰는가? 또는 이 글을 쓰기 위해 영화를 만드는가? 둘 다 말이 안 될 이유가 없다. 따라서 이 글은, 만들어질지도 모르는 가상의 영화에 대한 기반이거나 해제이다. 또는 이러한 정의가 너무 거창하다면, 나는 그냥 이런 글을 쓸 때 가장 즐겁다.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떠들어대는 글.
2.
언제나 시작점은 영화다. (거짓말이다. 어떻게 시작점이 언제나 영화인가? 그렇지만 거짓말이라도 유효한 수사가 있다) 시작하고 나면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 시작하고 나면 많은 것에 불만을 가질 수 있다. 나는 영화가 꿈을 다루는 방식이 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꿈에다가 몽환이라는 이미지는 대체 누가 부여한 것인가? 단 한 번이라도 몽환적인 꿈을 꾼 적이 있는가? 그러니까, 온통 보라색이거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거나 몽롱한 음악이 흐르는 꿈을 진짜로 꾸냐고. 나의 꿈이 그런 식으로 작동한 적은 단연코 없다.
꿈과 몽환의 부당한 결탁은 내용적 불만. 형식도 물론 달갑지 않다. 꿈은 3인칭이 절대 성립하지 않는다. 언제나 1인칭의 꿈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얼굴을 꿈에서 보지 못한다. 그리고 꿈은 편집이 없다. 오직 하나의 꿈에서 다른 꿈으로 넘어갈 때만 숏의 전환이 일어난다(물론 그 전환 사이에는 얼마의 간격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블랙아웃을 인지하지 못하므로, 숏의 전환처럼 즉각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하나의 숏이 곧 하나의 씬이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영화들이 극(劇)이라는 대의를 위해 이러한 꿈의 규칙들을 무시했는가. 그것이 나의 오랜 불만이었다.
3.
그러니까 꿈이라는 건 사실, 영화보다 삶에 더 가까운 것이다(이 문장이 중의적임을 눈치챘는지?). 꿈의 규칙은 곧 삶의 규칙이다. 꿈을 꾸고 있는 동안에는 그것이 진짜 삶인 줄 아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꿈과 삶을 어떻게 구분하는가? 그것은 물론 꿈에서 깨는 순간이다. 몇 개의 꿈을 거친 뒤 마침내 마지막 숏. 커튼 틈새로 비치는 천장의 햇빛. 차렵이불의 포근함. 알람 소리. 그러나 이게 다인가? 물론 아니다. 꿈과 삶을 한 움큼 도려내 블라인드 테스트를 해보자(물론 상상으로). 우리 모두 자신 있게 구분할 수 있지 않은가. 꿈은 내재적으로 삶과 차이가 있다. 다시, 꿈은 파편화된 삶이다. 익숙한 인물. 익숙한 배경. 익숙한 사건. 그러나 익숙하지 않은 조합. 싫어하는 교수님이, 군대에서, 담배를 피운다. 폴 다노가, 비행기에서, 해금을 켠다. 전혀 개연성이 없는 이야기를 꿈은 기어이 설득해낸다. 어떻게? 삶의 규칙을 따름으로써. 삶의 규칙이란? 2에서 나열한 것들(아까는 꿈의 규칙이라 쓰지 않았냐고? 그러니까 꿈의 규칙이 곧 삶의 규칙이다). 사실적인 톤. 1인칭 시점. 영겁의 롱테이크. 꿈은 삶에서 의미를 해체한 뒤 다시 삶의 문법을 따르며 재구성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간극을 놀랍게도 명확히 인식한다.
4.
여기서 다시 영화로 돌아가자. 정말 어려운 질문 하나. 우리는 영화를 왜 보는가? 좋은 영화란 무엇인가? 이 두 개는 질문 하나가 맞다.
답은 물론 삶을 이해하기 위함이다. 그전에 짚고 넘어가자. <극한직업>을 보며 삶을 이해하는가? <분노의 질주>를 보며 삶을 이해하는가? 누구에게는 그럴 수도, 누구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나의 답은 개별론이 아니다. 영화를 보는 행위가 궁극적인 차원에서 어떤 행위로 치환될 수 있는가에 대한 견해다. 그러니까 항상 삶을 이해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영화관에 가는 사람은 없다. 그저 웃고 즐기기 위해 <극한직업>을 보고, 시원한 액션으로 여름 나기를 하려고 <분노의 질주>를 보더라도 나의 답은 유효하다. 우리가 코미디를 찾는 이유, 액션을 찾는 이유. 경찰이 치킨집을 여는 데서 오는 웃음, 자동차가 터지는 데서 오는 시원함은 우리의 삶이 축적한 메커니즘에 따른 결과다. 동시에 그 메커니즘에 하나의 사례를 더 추가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좋은 영화란, 삶에 대한 이해를 더욱 풍부하게 하는 영화다. 이제부터 이것은 ‘어떻게’의 문제가 된다. 커뮤니케이션의 문제.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물론 이것은 ‘어떻게 보게 할 것인가?’와는 다른 문제다) 이 부분은 잠시 건너뛰자. 다만 몇 가지 지점들은 먼저 논해야 한다.
첫째, 무엇이 삶에 대한 이해의 저변을 넓히는가? 무엇이든. 무엇이든 삶의 정수가 될 수 있다. 무엇이든 영화가 될 수 있다. 감독은 그저 자신의 머리와 가슴이 따르는 부분을 파헤치면 된다(그러니까 더더욱 ‘어떻게’가 중요하다). 나는 <몬티 파이튼의 성배>에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보았고,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에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을 보았다. <아멜리에>에서 사랑의 실체를 보았고, <더 랍스터>에서 사랑의 허상을 보았다. 무엇이든, 영화가 될 수 있다.
둘째, 감독의 의도가 우리에게 닿지 않는다면? 소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 영화들에 대하여. 가장 단순한 형태의 커뮤니케이션도 필연적으로 정보 손실이 일어난다. 이는 수신자와 발신자 어느 한쪽의 책임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저 우리가 볼 수 있는 만큼만 영화를 보면 된다. 우리가 이해(라는 말도 사실 웃기다. 우리가 정말로 ‘이해’한 게 있기나 하는지)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고 하여 그 영화를 논할 자격이 박탈되지 않는다. 난해함을 유난히 혐오하는 것도 또는 유난히 찬양하는 것도 나에게는 부자연스러운 태도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삶에 대한 메시지는 얼마나 은밀해야 하는가? 은밀함은 작품성과 직결되는가? 이 질문의 의도는 알다시피, 이런 것이다. 누가 봐도 중요한 순간에, 중요한 음악과 함께, 중요한 인물이 뱉는 대사. 거기에 모든 주제가 들어가 있는 영화는 왜 유치해 보이는가? 수가 뻔히 읽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역시나 삶의 규칙. 우리의 삶이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니까 은밀함이 작품성과 직결되는 게 아니라, 삶이 그렇게 단순하고 편리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좋은 주제는 알아서 숨어 들어간다는 것이 나의 오랜 생각이었지만. 직설적으로 목소리를 내야 하는 삶의 단면이 있다는 것도 이제는 인지한다. 이전에 다른 글에서 이런 생각을 다룬 적이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더 늘여 쓰지 않기로.
5.
우리는 영화를 왜 보는가? 삶을 이해하기 위함이다. 나는 여기에 갖가지 보험과 부연 설명을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설득력이 부족함을 알고 있다. 스스로도 완전히 설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역시나 정말 어려운 질문 하나. 따라서 우리는 보조 관념이 필요하다. 삶과 영화, 그 사이에, 꿈.
우리는 보조 관념이 필요하다. 원관념과 보조 관념. 영화 같은 삶, 영화 같은 꿈, 꿈 같은 삶. 꿈 같은 영화 삶, 같은 영화…… 삶 같은 꿈? 우리의 언어 체계는 여기서 도움이 안 된다. 그저 아까부터 하던 짓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 둘 씩 비교하기. 영화와 꿈. 꿈과 삶. 삶과 영화. 이제 다시 영화와 꿈.
꿈과 영화는 삶을 닮고 싶어 한다. 그러나 절대로 삶이 될 수 없다. 왜? 삶은 직선이고(드디어!) 꿈과 영화는 선분이기 때문이다. 이는 물론 우리가 인지하는 차원에서의 얘기다. 그러니까 삶에도 태어남과 죽음이라는 끝점이 있지만, 우리는 이 둘을 인지하지 못한다. 우리는 삶에 대하여 절대 외부자로 존재할 수 없다. 삶은 과거이자 현재이자 미래다. 그래서 직선이다. 꿈은? 우리가 인지하는 꿈의 끝점은 실제와 다르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는 꿈 밖에서, 우리 나름대로 꿈의 시작과 끝을 추려볼 수 있다. 그래서 선분이다. 영화는? 러닝타임. 시작과 끝. 당연히 선분이다.
같은 선분이라지만 꿈과 영화는 역시 다르다. 우리는 영화를 보는 동시에 그 끝을 인지하지만, 꿈을 꾸는 중에는 그러지 못한다. 왜? 내부와 외부. 우리는 영화를 볼 때나 보지 않을 때나 영화의 밖에 존재한다. 그러나 꿈을 꿀 때는 잠시나마 그 꿈의 내부자가 된다. 영화에 과몰입할 때 우리가 하는 말. 끝나는 줄도 모르고 봤네. 그러니까 중요한 건 선분과 직선이 아니라 내부와 외부일지도 모른다.
또 다른 차이. 꿈은 개인적이고 영화는 집단적이다. 꿈 녹화 기술이 나오지 않는 이상 그 비주얼은 온전히 꿈꾼 자의 것이다(그러므로 그 기술이 나온다면 이 글은 다시 쓰여야 한다). 개인이 생산하고 개인이 소비하는 꿈. 그러나 영화는 집단이 생산하고 집단이 소비한다. 즉 개인을 조금씩 깎아내어 정제해야 한다. 영화의 보편성. 질 대신 양. 따라서 영화는 불가피하게 꿈(이 삶에서 멀어진 것)보다 더 삶에서 멀어져야 한다. 그러니까 꿈이라는 건 사실, 영화보다 삶에 더 가까운 것이다(이 문장을 기억하는지?).
영화-꿈-삶. 나는 이 도식을 믿는다. 그러나 직관적으로 와닿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삶을 이해하는 데 꿈보다 영화를 더 많이 쓰기 때문이다. 아이러니. 영화가 삶에서 더 멀어져야 했던 바로 그 이유. 집단적 경험. 그 때문에 오히려 담론이 더 쉽게 만들어진다. 각자의 꿈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할 바에는, 하나의 영화를 두고 이야기하는 편이 낫다. 삶과 꿈과 영화. 이 기묘한 삼각관계.
6.
잊지 말자. 이 모든 건 정말 어려운 질문 하나에 답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영화를 왜 보는가? 좋은 영화란 무엇인가? 삶을 이해하기 위함이라 했다. 그런데 좀 부족하니 꿈이라는 보조 관념을 끌고 왔다. 거의 다 왔다.
영화가 그리는 꿈에 대한 나의 불만을 기억하는지? 사실 그렇게 불만스럽지 않다. 꿈도 영화도 어차피 삶이 될 수 없는 거라면, 영화가 꿈을 꿈답게 그려야 할 필요는 또 무엇인가? 그렇다면 어째서 영화는 꿈을 끌어다 쓰는가? 삶에 대한 이해. 이해에 대한 나의 불만도 기억하는지? 이건 기억해주어야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삶을 이해할 수 없다. 영원히 이해할 수 없다. 언제나 이해하려 하지만 영원히 이해할 수 없다. 영원히 이해할 수 없지만 언제나 이해하려 한다. 삶을 이해하는 것은, 그것이 단 일인분의 삶임에도 너무 벅차서, 우리는 꿈을 가져다 쓰고 영화를 가져다 쓴다. 언제나 시작점은 삶이고 종착점도 삶이다. (그렇다, 이건 거짓말이 아니다. 삶은 직선임에도 불구하고 이건 거짓말이 아니다.)
7.
삶으로 시작해서 삶으로 끝나야 한다. 그런데 삶은 직선이다. 시작도 끝도 없는 삶을 영화는 어떻게 드러내는가? ‘어떻게’의 문제. 잠시 건너뛰었던 것을 기억하는지? 이제 그 방법론을 말할 차례다.
첫째는 삶의 일부를 그대로 도려내는 것. 직선의 일부. 선분. 그러면 그 선분이 직선 전체에 대한 제유법이 된다. <결혼 이야기>. <로마>. <남매의 여름밤>.
둘째는 꿈을 모방하는 것. 가장 난해해 보이지만 오히려 합리적인 선택이다. 영화-꿈-삶. 삶이 될 수 없다면 꿈이 되는 것도 하나의 방법. 린치가 그렇고 공드리가 그렇다.
마지막. 여기를 주목해달라. 영화는 새로운 방법을 찾았다. 영화는 삶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영화는 어떻게 스스로를 증명하는가? 차라리 영화적이 되는 것. 영화적인 영화. 영화가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를 긍정하고, 대신 그 한계의 미학을 극대화하는 경험을 만드는 것. 이는 삶과 분명한 차별성을 갖지만, 놀랍게도 삶에 대한 비유로 작동한다. 선분도 아니고 직선도 아닌. 왕가위가 그렇고 홍상수가 그렇다. 라스 폰 트리에가 그렇고 란티모스가 그렇다.
분량의 불균형에서 나의 취향이 드러났는가? 그렇다면 오해다. 사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아직) 첫 번째 유형이 가장 많다. 그러나 만약 내가 살면서 단 하나의 영화를 만들 수 있고, 그 이름표를 일생 동안 달고 다녀야 한다면. 나는 선분도 아니고 직선도 아닌 영화를 만든다.
8.
이 글을 쓰는 내내 악몽을 꿨다. 아이디어를 떠올리다가 잠들기만 해도 그랬다. 프로이트를 읽을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는데, 이쯤 되면 꿈이 일종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 어떤 의미에서 나는 저널리즘에 입각하여 이 글을 썼다. 이제야 언론정보학과 덕을 보게 된 셈이다.
그만둘까 여러 번 고민했다. 그러나 무서울 정도의 불안함을 안고 어쨌든 앞으로 가지 않았는가, 매번. 그렇게 제주를 왔고. 그렇게 내 미래는 아직도 비었고. 그렇게 여기까지 왔다. 여전히 삶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