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빽카데미 어워드 - 2부

2020년 감상한 예순여섯 편의 영화들에게

by 백창인

#애니메이션


영화를 장르로 구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장르가 그 영화의 틀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니메이션은 이야기가 좀 다르다. 그건 장르라기보다는 영화의 다른 갈래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애니메이션은 실사 영화와 견주었을 때 한계와 가능성이 뚜렷하다. 실사 영화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을 표현하지 못하기도 하지만, 실사 영화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기도 한다. 따라서 애니메이션만이 그려낼 수 있는 것을 목격할 때 더 높은 점수를 주게 된다. 그리고 나한테 애니메이션의 독자적인 영역은 실세계에서 경험할 수 없는 환상으로 보통 정의된다.


<모노노케 히메>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정체성을 뚜렷이 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그의 작품에서 악역들은 진정으로 악하게 느껴지지 않는데, 이는 악역마저도 사랑을 토대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출에서는 어떠한 감동도 느끼지 못했던 <고양이의 보은>마저도 나에게는 충분히 훌륭한 작품이다. 나에게는 수트를 입은 고양이가 멋있게 느껴졌다는 이유만으로 애니메이션의 의의를 챙길 수 있는 것이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실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타임 리프’를 다룸에도 불구하고, 크게 인상깊지 않았던 것은 작화나 캐릭터들이 오히려 현실 세계에 가깝기 때문이다. 같은 내용으로 실사화된 버전이 나에게는 더 와닿았을 지도 모른다.

Honorable Mentions: <고양이의 보은>, <모노노케 히메>, <시간을 달리는 소녀>


이런 이유로 이 부문은 <파프리카>가 수상의 영예를 안는다. 꿈은 이렇게 다뤄져야 한다. 먼저 보았던 <인셉션>은 이 작품에 비하면 좋게 말해 순한 맛, 나쁘게 말해 겉핥기다. 이 세상 것이 아닌 몽타주와 미장센, 그리고 개구리. (<매그놀리아> 때부터 나는 왜 이렇게 개구리에 환장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전체적인 플롯도 꿈의 역학과 조응하며 몇몇 장면을 넘어 영화 전체에 환각을 입힌다. <파프리카>처럼 억지로 몽환적인 척하지 않아도 취하게 만드는 영화들이 있다. 진짜로 “이해하지 말고 느껴야” 할 작품은 이런 게 아닐까.

축하합니다. <파프리카>


# 연기상


이 부문에서는 남녀, 주조연을 가리지 않고 나를 감탄하게 만들었던 배우들에게 크레딧을 전하고자 한다. 연기론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가장 주관이 많이 개입되는 부문이지 않을까 싶다.


올해는 유난히 새로 알았거나 다시 보게 된 배우들이 많아 개인적으로 풍성한 한 해였다. 만약 나의 리스트가 TV 시리즈까지 포함했다면 이 상은 고민 없이 <퀸스 갬빗>의 안야 테일러 조이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지금까지 미뤄 놓고 있던 그녀의 출연작들을 봐야 할 강력한 계기가 되었으니까. 그러나 이를 빼고 본다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전도연은 그 화려한 멀티 캐스팅의 영화를 자기 독무대로 만들어 버렸고, <퍼니 게임>아노 프리스치는 내가 지금까지 본 영화 가운데 가장 섬뜩한 악역이었다. 다시 언급된 <에놀라 홈즈>밀리 바비 브라운은 <기묘한 이야기>를 보고 싶다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으며, <친절한 금자 씨>에서 내가 느꼈던 부끄러움의 5할은 이영애를 <봄날은 간다>로만 기억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메기>구교환은 그냥 좋았다. 개인적으로 만나서 영화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Honorable Mentions: 아노 프리스치, 구교환, 이영애, 전도연, 밀리 바비 브라운


그러나 올해 연기 부문에서 나에게 가장 큰 충격을 안긴 배우는 단연 로버트 패틴슨이다. 올해 전까지 나는 로버트 패틴슨을 <트와일라잇>의 그저 그런 미남 배우로 알고 있었다. 심지어 <트와일라잇>을 보지도 않고 말이다. 그러나 <굿타임><라이트하우스>를 보고 그의 팬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자는 책임감과 편집증을 겸비한 형을, 후자는 무기력의 광기를 보여주는 후배 등대지기를 연기한다. 거의 정반대의 배역을 완벽하게 소화해 낸 셈이다. 두 영화 모두 두 명의 주연이 극을 이끌어 가는데, 내 기준에서는 로버트 패틴슨의 2승이다(심지어 한 번은 윌렘 데포를 꺾고!) 일련의 작품들에서 한 배우에게 매력을 느낄 때면 단순히 연기력에 감탄하는 것을 넘어 그의 행보를 응원하게 된다. 로버트 패틴슨의 차기작이 기다려진다.

축하합니다. 로버트 패틴슨


# 1. 자기 얘기


자기 얘기를 하는 영화가 좋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는 영화가 좋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주류 담론에 의해 다뤄질 수 없는 것일 때 각별히 아낀다. 예를 들어 <스파이 브릿지>는 분명 훌륭한 영화다. 미국의 토대가 되었으나 언젠가부터 희미해진 자유에 대해 스필버그 답게 술술 풀어낸다. 그러나 미국과 개인과 자유는 너무 많이 이야기되었다. 이야기될 기회가 너무 많았다. <걸후드>가 나에게 더 와 닿았던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우리집>과 <우리들>을 먼저 봤지만, 그 전의 단편들인 <콩나물><손님>에서부터 윤가은 감독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훗날 나의 자식들에게 기꺼이 보여주고 싶은 영화를 만든다. <레이디 버드>는 <벌새>와 같이 내가 겪어볼 수 없는 비슷한 또래 여성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점에서 소중한 경험이었다. <맹크>는 일종의 메타-영화로서, 영화인만이 돌아볼 수 있는 것들을 관객에게 제시한다. 그 유명한 <시민 케인>의 오손 웰스가 아닌 각본가 허먼 맹키위츠의 목소리를 통해. 무엇이든 영화로 만드는 할리우드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영화에 대한 영화는 귀한 자산이 된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가 여기 있다>는 현재 활동 중인 현대미술가를 직접 스크린에 데려와 예술이 무엇인지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한다.

Honorable Mentions: <맹크>, <콩나물>, <걸후드>, <스파이 브릿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가 여기 있다>, <레이디 버드>


# 2. 자기 스타일


자기 스타일이 뚜렷한 영화가 좋다.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톤 앤 매너를 가진 영화가 좋다. 개연성이 조금 떨어지더라도, 만듦새가 깔끔하지 못한 부분이 있더라도, 감독의 인장이 선명히 찍혀 있으면 흔쾌히 눈감고 넘어갈 수 있다.


원래는 웨스 엔더슨의 스타일이 내 취향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문라이즈 킹덤>에서 보여준 서늘한 듯 따뜻한 대칭성에 생각을 고쳐 먹었다. <님포매니악>은 너무 잘해서 재수 없는, 그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류의 작가주의다. 나는 ppt 재질의 연출에 언제나 무력화된다. <400번의 구타>의 고정된 프레임, <퍼니 게임>의 되감기 씬은 그것 하나만으로 크레딧에 올릴 가치가 충분하다. 뻔뻔한 메타포도 좋아한다, <메기>에 진짜로 나오는 메기처럼.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를 보면서는 나도 이 난장판에 끼고 싶다는 생각이 절실히 들었다. <언컷 젬스><라이트하우스>는 여기서 마땅히 한 번 더 언급되어야 한다. 특히 <라이트하우스>는 대상 자리를 놓고 한참을 고민했는데, 그로테스크함과 세련됨이 공존할 수 있음을 완벽하게 증명했기 때문이다. 갈기갈기 찢겨 더 가격이 올라간 명품의 느낌이다.

Honorable Mentions: <문라이즈 킹덤>, <님포매니악>, <퍼니 게임>, <400번의 구타>
Honorable Mentions: <언컷 젬스>,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메기>, <라이트하우스>


# 3. 삶


그러나 대상의 자리는 이 영화에게 돌아가야만 했다. 올해 이 영화를 본 이후로 한 번도 그 자리를 위협받은 적이 없었다. <라이트하우스>는 내가 껌뻑 죽을 스타일로 무장했지만 확실히 자기 얘기는 아니었다. 다시 말해 대상은 자기 얘기를 하는 동시에 자기만의 스타일을 갖춘 영화가 받아야 한다. 삶을 걸고 만든 작품에, 삶을 드러내는 작품에, 삶을 기만하지 않는 작품에.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누가 보아도 ‘혐오스러운’ 하나의 삶을 시작부터 끝까지 추적하며 혐오의 근원을 드러낸다. 그 근원이란 어느 한 사건으로 인한 귀결이 아니라 마츠코가 걸어온 모든 발자국에 묶여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모든 조각이 혐오스러울 만큼 얽히고설킨 게 삶이다. 따라서 추적의 끝에 다다르게 되면 우리는 혐오스러운 것이 ‘마츠코’가 아니라 ‘일생’ 임을 알게 된다. 삶은 종종 우리를 혐오에 빠뜨리지만 그것이 우리 존재를 혐오로 만들지는 않는다.

삶을 사랑하려 한다. 나의 삶과 너의 삶 모두. 나의 삶을 사랑하는 것은 쉽다. 너의 삶은 내가 살아보지 않았으므로 사랑하기 어렵다. 가끔은 그것을 너라는 존재의 부정과 혼동하기도 한다.

언뜻 눈부신 판타지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영화는 결코 우리의 삶에서 이탈하지 않는다. 끈질기게 달라붙으며 기어코 삶을 최후까지 사랑해 낸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에서 목격한 것은 어쩌면 내가 유일하게 믿고 있을지도 모르는 윤리다. 그 믿음으로 2020년을 살았다.

축하합니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