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이라도 바랐나"
수능이 연기되고 감정에 북받쳐 쓰다 만 글이 있다. 그 글을 이어 쓰고자 했으나 수능이 끝나니 아무 소용이 없게 됐다.
수능은 마지막 강제라고 생각해왔다. 물론 수능을 치르는 것이 절대적 의무는 아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수능과, 수능을 위한 공부와, 수능을 위한 제반의 노력이 강제에 가까웠음을 이해할 것이다. 읽고 싶은 책을 마음대로 읽지 못했고, 보고 싶은 영화를 마음대로 보지 못했다.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가지 못했고, 나누고 싶은 마음을 마음대로 나누지 못했다. 이러한 구속들에서 해방되는 기점을 수능이라고 남몰래 정해왔다. 철부지가 어른을 아직 몰라서 그런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어쨌든 나는 그랬다. 수능이 끝나고 나의 중심이 보다 나에게 가까워질 것이라 믿었다. 인생에도 패러다임이 있다면 오늘이 바로 그 전환기라고 믿었다.
당일의 기억은 별 게 없다. 창밖으로는 이따금씩 전철이 지나갔다. 국어 시험을 마치고 나오니 세상이 온통 하얬다. 마지막 과목을 앞두고는 구름이 붉었다. 한문 시험까지 치르니 하늘은 이미 어두웠다.
어떠한 행복감이나 해방감도 없었다. 안도감이나 후련함도 없었다. 놀라울 만큼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날을 흐지부지 보내고 맞은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이런저런 셈은 여전했고, 주위를 오가는 말들은 아직도 멀쩡했다. 하고 싶은 걸 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정작 하고 싶은 것은 없었다. 읽고 싶지만 무엇을 읽어야 할지 모르고, 보고 싶지만 무엇을 봐야 할지 몰랐다.
무력감이야 고질적인 습관이니 그러려니 할 수도 있겠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나는 구속이 사라진 뒤에도 왜 나의 목적을 찾지 못할까. 집에 오면서 우습게도 코끼리에 대한 일화가 떠올랐다. 쇠사슬에 묶여있던 어린 코끼리는 무던히도 쇠사슬을 끊기 위해 노력하지만 단념하고 만다. 코끼리가 자랐을 때, 쇠사슬을 풀고 얇은 밧줄에 묶어도 코끼리는 끊을 생각을 못한다. 어렵지 않게 이유를 추론할 수 있다. 외적 구속에서 벗어났지만 내적 구속에서 벗어나지는 못한 것이다. 그때부터는 코끼리 역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나는 무엇을 바랐나. 개벽이라도 바랐나. 그랬다면 단단히 잘못 생각한 것이다. 세상이 열리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열어야 하는 것이다. 세상은 언제나 열릴 준비가 되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중심은 남이 뺏어간 것이 아니라 내가 밀어낸 것이다. 수능이 나에게 어떠한 교훈이라도 주었다면 대략 이쯤이 있겠다.
17.11.24.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