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개벽 2

"지나간 발자국의 깊이"

by 백창인

개벽이 어려운 것만도 아니다. 간단한 방법을 소개한다. 가까운 역에서 지하철을 탄다. 잠을 청해도 좋다. 적당히 달린 후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역에서 내린다. 그리고 출구를 향해 천천히 걷는다. 영화의 주인공이라도 된 듯이, 천천히 걸어야 한다. 계단을 올라갈 때가 중요하다. 고개를 너무 일찍 들지 않는다. 개벽에는 적당한 유예가 필요하다. 충분히 계단을 올랐을 때 고개를 치켜들면 파란빛이 환하게 쏟아진다. 그리고 눈앞으로 완벽한 낯섦이 펼쳐진다. 2000원이 채 안 되는 개벽이다.


농담은 관두자. 개벽 개벽 하지만 사실 이런 말은 잘 안 쓴다. 친구들에게는 전환기라고 곧잘 말한다. 그것도 개벽이라면 나는 두 번 개벽을 경험했다. 첫 번째는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다. 좋은 중학교였다. 내 의지라기보다는 부모님의 의지였다. 나는 지금도 부모님이 그러한 의지를 보여주신 데에 무한히 감사하다. 두 번째는 <이방인>을 읽었을 때다. 이거야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이방인>은 이제 나에게 정치적 수사에 가깝다.


이러한 개벽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 순간에는 그게 개벽인지 모른다. 돌아보니 개벽인 것이다. 내가 밟고 있는 시간의 무게를 알 수 없다. 지나간 발자국의 깊이를 보고 가늠할 뿐이다. <개벽>에서 수능이 끝났지만 개벽은 없다고 말했다. 그랬다면 단단히 잘못 생각한 것이다. 나는 이미 며칠 전 개벽을 경험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17.11.26.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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