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진술하자"
글에도 리듬이 있다고 믿는다. 재진술하자. 작곡은 오선지에만 하는 것이 아니다.
재진술하자. 붓 가는 대로 쓰는 게 수필(隨筆)이라지만 손동작의 박동이 남아있다. 지휘봉을 휘두르는 지휘자와 같다. 그러나 나의 글이 교향곡은 못 된다. 장르는 무의미하다. 고유한 것은 장르가 아니라 음악이다. 쇼팽과 슈만과 리스트를 뭉뚱그리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장르는 무의미하지만 뮤즈는 빛난다. 나의 뮤즈는 카뮈가 아니라 쿤데라다. 나는 어느새 쿤데라의 글을 쓰고 있었다. 쿤데라의 소설은 전장(戰場)이다. 작가가 소설의 최전방에서 빛나는 통찰을 쏘아댄다. 서사는 제쳐두고 신선한 아이디어로 잔뜩 채워놓는다. 소설은 흔히 ‘보여주기’일 때 높은 작품성을 인정받지만, 쿤데라는 그 원칙을 깡그리 무시하고도 대단한 글을 써낸다. 모르는 사이에 나는 그러한 정신에 경도되었나 보다. <조우>와 <조우 2>의 거리감에 새삼 놀란다.
형식이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쿤데라는 뮤즈다. 오늘 읽었던 글 중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이다.
“내가 처제를 끝내 설득하지 못했다면, 처제에게 뭔가를 금지할 권리도 없는 거야.”
“내 말이 그 말이에요. 형부는 겁을 내는군요.”
“난 처제를 이성으로 설득하고 싶었어.”
그녀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형부의 의사를 내게 강요하는 게 두렵기 때문에, 이성을 방패막이로 삼는 거라고요. 내가 형부를 두렵게 하다니!”
이것뿐이라면 할 말이 없다. 그런데 인상 깊었던 이유가 지하철에서 내리기 직전에 읽었기 때문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이 글을 성실히 읽었다면 무슨 이유로 제목이 이러한지 모를 것이다. 그러나 이전의 글들을 성실히 읽었다면 마땅히 폴 토마스 앤더슨의 <매그놀리아>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런데 <매그놀리아>를 성실히 봤다면 무슨 이유로 제목이 그러한지 모를 것이다. 그제야 이 글을 성실히 읽었다면 무슨 이유로 제목이 이러한지 알 것이다.
17.11.30.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