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이 부끄러움으로 빛나려면"
글쓰기는 내가 아는 가장 자유로운 활동이다. 나는 글을 쓸 때 가장 자유롭다. 그 누구도 나에게 주제나 형식을 강요할 수 없다. 가령 <매그놀리아>는 불친절하다. ‘공유된 글은 읽혀야 한다’는 스스로의 원칙에서 한참 벗어난 글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 글을 쓰고픈 욕심이 있었고, 누구의 간섭 없이 실천에 옮겼다. 실체 없는 허영심으로 비칠지라도 괜찮다. 온전히 내 손 아래 빚어냈기에 그에 따르는 책임 또한 즐겁다.
그러나 글이 주는 자유는 동시에 나를 옭아맨다. 방 정리를 하던 중 먼지 쌓인 글을 찾아 몇 줄 옮긴다.
나는 내 세상에 흠뻑 취해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의 내가 생각하는 나 자신은 기본도 되어있지 않은 한없이 작은 그릇일 뿐이다. 지난 16년을 잘못 보내도 너무 잘못 보냈다는 생각을 하면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그릇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4년 전의 글에 비해 나는 얼마나 성장했는가. 나는 여전히 ‘지금 여기’를 ‘배움이 없는 시간’으로 생각하며, ‘쭉정이’밖에 못 되는 것에 부끄러워한다. ‘후회의 양상’은 크게 달라진 게 없고, ‘누림의 미학’을 원하면서 ‘배고픈 사람’의 지위를 잃기 싫어한다. 위의 글 역시 ‘정리하는 삶’에서 찾은 것이며, 계속해서 ‘경복궁’만 들른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최고작’을 쓸 수 있다는 허황된 믿음에 빠져있다. 일관적이라고 좋아만 할 텐가. 말하자면 <지금 여기>가 거대한 동어반복이었던 셈이다.
그때의 나는 이미 문제를 제대로 짚어냈다. 자유에 흠뻑 취한 것이다. 손끝을 움직여서 잉태한 세계는 너무 달콤했다. 오감을 마비시키는 달콤함이었다. 찰나의 인상이 문장으로 승화되는 순간에 중독되었다. <이방인>에서 얻은 한 움큼의 영감은 이미 바닥이 났다. 새 우물을 찾아야 하는데 아직도 헌 두레박을 핥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사유라며 반성이라며 이름짓는다.
세상은 ‘짓’의 연속이다. 모두가 어떠한 짓을 위해 태어났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서 나는 어떠한 몸짓이라도 만들어내는가. 부끄러움은, 좁다고 자칭하는 그릇은 나의 은근한 무기가 아니었는가. 고작 나만의 안식처를 만들어놓고는, 금자탑이라도 쌓은 듯이 행세한 것은 왜 진작에 부끄러워하지 못했는가.
여태껏 발이 묶여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학생이 낼 수 있는 발자국은 충분히 못 깊기에 손이라도 자유롭게 놀려보자는 심산이었다. 더 이상은 핑계가 없다. 구속받던 모든 것에서 풀려났다. 부끄러움이 부끄러움으로 빛나려면 아이러니하게도 손을 멈춰야 한다.
첫 번째 개벽에서 나는 책을 들었다. 두 번째 개벽에서 나는 펜을 들었다. 이제 나는 발을 들고, 그것이 세 번째 개벽임을 직감한다. 웃음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을 도통 참을 수가 없다.
18.01.31.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