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하사탕 같은 행복"
금요일은 밤까지 서울에서 동아리 활동을 한다. 주말은 일산에서 알바를 한다. 막차를 타고 본가에 가려면 못 갈 것은 없지만, 보통은 자취방에서 금요일을 보낸다. 일정 변동이 없는 이상 알바는 오후 세 시에 시작한다. 그러면 적어도 오후 한 시 쯤에는 자취방을 나와야 한다.
자취방(서울 관악구) - 서울대입구역 - 당산역 - 알바(고양시 일산동구)
1. 자취방 - 서울대입구역(501번 버스)
녹두 골목을 타고 들어오는 바람은 더운 기운이 싹 가셨다. 겉옷을 입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취방에서 서울대입구역을 갈 수 있는 버스는 많다. 공교롭게도 이 날은 '곧도착'인 버스가 한 대도 없었다. 가장 빨리 오는 버스가 5분, 노래를 들어도 한 곡 반. 기다림의 시간을 알고 나면 유난히 다리가 아프다. 담배나 한 대 피우고 올걸 싶었다.
딱 한 곡 반 정도를 듣고 나니 '곧도착'에 두 대가 떴다. 5515번은 '혼잡', 501번은 '여유'. 시야에도 두 대가 모두 잡혔다. 501번은 이름대로 여유를 부리는지 5515번 저 뒤에서 어슬렁 기어오고 있었다. 시간을 보니 나도 그 정도 여유는 부릴 만했다.
지난 주 본가에 있을 때 <불멸>을 집어왔다. 후배와 책 이야기를 하다가 생각이 나서, 새 책을 위해 도서관을 가기는 귀찮아서, 무엇보다 핸드폰 데이터를 다 써서. 아니었으면 또 시시껄렁한 예능 클립들을 보며 왔을 길이다. 읽었던 책이라 책장이 빠르게 넘어갔다. 그러면 괜히 버스에서 내리기 싫어지고는 한다. 서울대입구역으로 넘어가는 언덕은 늘 꽉 막혀있는데, 교통 체증이 반가워지기는 또 오랜만이었다.
2. 서울대입구역 - 당산역(지하철 2호선)
장거리 코스를 달리면 담배를 어디서 태우는 게 좋을지 생각한다. 제1코스는 보통 자취방 앞, 아니면 당산역에서 내린 뒤가 적기다. 그런데 오늘은 그냥 지하철을 타기 전에 피우고 싶어졌다. 방을 나올 때부터 그러리라 마음먹었다. 기분 따라 하는 짓에 규칙을 세울 필요는 없다.
개찰구를 따라 내려가면 대충 오늘의 운세를 짐작할 수 있다. 같은 요일 같은 시간이라지만 매번 같은 수의 사람이 지하철에 타지는 않는다. 이미 스크린도어 앞에는 사람들이 서너 명씩 무리지어 서 있다. 앉아서 가기는 글렀다.
지하철은 와이파이가 잘 터진다. 그새 놓친 소식이 있을까 재미가 있을까 연락이 있을까 하여 뒤적거렸다. 그러다 왼손에는 소설을 오른손에는 아이폰을 쥐고 있는 꼴이 우스워졌다. 누가 보지도 않는데 멋쩍게 오른손을 뒷주머니에 쑤셨다.
책읽기를 도중에 그만둘 때 버릇처럼 도지는 악취미가 있다. 꼭 페이지 수를 깔끔하게 맞춰 끝내야 되는 것이다. 100이라든가, 77이라든가. 60페이지를 마무리 짓겠다고 억지부린 탓에 합정역에서 내릴 뻔했다. 이러나저러나 일산은 간다. 그래도 지체될 뻔한 시간을 당겼다는 느낌은 박하사탕 같은 행복이다.
3. 당산역 - 알바(1500번 버스)
일산 가는 버스를 타려면 9호선에 가까이 있는 9번 출구로 나와야 한다. 그래서 2호선 당산역에서 내리면 버스정류장까지 부지런히 걸어야 한다. 두 곡을 듣고 세 번째 곡이 시작할 즈음에는 버스정류장이 늘 보인다.
당산역에서 일산까지 가는 버스는 세 대다. 9707번은 돌아가니 제쳐두고, 1500번과 830번이 비슷한 선택지다. 기다리는 줄이 각각 있기 때문에, 둘 중 먼저 오는 것을 마음대로 탈 수는 없다. 버스정류장에 설 때부터 이후의 운명을 모조리 맡겨야 하는 셈이다. 이때부터 지도 앱을 켜고 남모르는 수읽기에 들어간다. 버스가 오기까지 몇 분이 남았으며, 그 버스에 몇 석이 남았으며 하는 등. 모두가 말은 안 해도 저마다 조용히 머리를 굴리고 있다. 그 눈치싸움도 한두번 해야 재미있지 매주 하면 짜증이 난다.
데이터를 다 써서 이번에는 싸움에 끼려야 낄 수도 없었다. 동전 뒤집기를 하는 심정으로 1500번 줄에 섰다. 한 대를 보내고 두 번째에 탔으니 나쁘지 않은 수확이다. 사실 830번도 크게 다를 건 없었다. 큰 의미가 없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내 악취미니까, 이 또한 박하사탕처럼 삼켜버리면 그만이다.
옆자리에 앉은 학생의 이어폰을 뚫고 음악이 흘러나왔다. 듣고 있자니 탈의실에 몰래 들어온 것처럼 부끄러웠다. 트로이 시반이었나 찰리 푸스였나. 팝은 잘 모르고 애써 기억해내기는 싫었다. 귀를 닫고 <불멸>을 다시 펼쳤다. 100페이지까지 읽으니 기가 막히게 도착 직전이었다.
차가 그렇게 막힌 것은 아닌데 정류장에서 내리니 두 시 오십 분이었다. 햄버거라도 사먹을 생각이었지만 단념하고 빵집을 갔다. 카스테라는 1600원이었다.